엄니의 따님들
시아버님의 기일. 일 년이 참 빠르다. 엊그제 제사를 올린 것 같은데……. 아버님이 8시 경에 돌아가셨으니, 그 시각 전에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게 엄니의 지론이시다. 그러지, 뭐. 까짓 것. 어려운 일도 아닌데 원하시는 대로 해 드려야지. 영감도 아들도 시간에 맞춰서 들어온다. 제 시각에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게 엄니의 철칙이니까.
이제 오십이 넘으니 그 새촘씨 시누이들도 모두 친구다. 설거지도 내가 하마, 걸레질은 내가 하마, 손이 마음 따라 척척이로고. 대문 열어라 현관 열어라, 아버님 혼을 모시느라 엄니의 목청이 오늘따라 낭낭 하시다. 제상과 마주앉아야 한다는 엄니를 제군(제사를 지내는 이)들 뒤에 앉히고,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이제 햇수로 8년 지나고 나니, 따님들도 제상 앞에서 웃음이 쏟아지시네.
“엄니. 아버님 보셨슈?”
“그랴.”
“뭐라셨슈?”
“니들 덕에 잘 먹고 간다더라.”
이젠 엄니도 넉살을 하실 만큼 세월이 지났음이야.
거실로 하나 가득 앉아 저녁을 먹고 수다가 한창이더니 모두 가야한다고 일어선다. 엄니 마음이거니 하고 떡 한 보따리에 과일을 서너 개씩 얹어 내미니 모두 마다한다.
“엄니 맘이야요.”
식구 적은 시누이들은 아마 가는 길에 아이들 많은 언니나 동생에게 건냈으련만, 엄니는 그래도 싫지 않은 표정이시군.
현관을 나서며 관례대로 큰 시누이가 봉투를 내민다. 각자가 갹출해서 모은 것이렸다.
“엄니. 받어유?”
“그랴. 받어.”
언제는 안 받은 것처럼…….
“땡큐!”
세워놓은 승용차가 다섯 대. 내 집 담이 승용차로 꽉 찼다. 으하하 이럴 땐 나도 부자 같구먼. 시누이들이라도 없었으면 난 무척 외로웠을 것이라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아, 언니. 화장대 위에 숄 하나 얹어놨는데.”
“어쩐 숄을?”
“어디 좀 갔다 왔어요.”
“이번엔 어디로요?”
“그냥 쩌~기요.”
외국 관광을 잘 다니는 막내 시누이가 또 외국엘 다녀온 모양이다.
“엄니. 따님들이 용돈 드렸슈? 많이 줬으믄 나도 좀 나눠 주지.”
“그년들이 언제 나 용돈 줘?”
잘 알면서도 그러냐는 듯, 아니 내 봉투가 탐이 나시는지도 모르지.
“가제는 게 편이라구, 큰 게 ‘엄마가 어디다 돈 쓰냐? 언니나 주자.’ 하더라구.”
“그래서 화났슈?”
“아~녀. 그렇단 말이지.”
“떡이랑 과일 몇 개씩 넣어 줬슈.”
“건 뭐러. 그깐 년들, 안 주믄 워뗘."
살짝 지나는 엄니의 눈웃음이, 꼭 잘 했다 소리 같이만 들린다.
“엄니는 이것만 쓰셔. 이건 오늘 제사 흥정하느라 나도 많이 썼으니께.”
돈 오 만원을 세어 건네니, 그만 두란 빈말도 없이 받아 주머니에 넣으신다. 금방 엄니의 얼굴이 환해지신다. 한 마디 더 하는 게 좋겠다.
“엄니. 따님 두엇 더 낳으실 걸 그랬어요.”
“그러게. 이럴 땐 많은 게 좋은디…….”
엄니도 참. 좋기는……. 아~니, 다섯 따님이 적어서?!
마루에 나오니 영감이 소파에 누워있다. 음복이 길어지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만 두란 소리도 없이 얼른 받아 넣으시네.”
“뭘?”
“고모들도 너무했어. 엄니 용돈을 좀 드리지. 살기 어려운 누이들이면 또 몰라.”
“그럴 리가 있어?”
“엄니가 '하나도 안 줬다.' 그러시는데?”
“…….”
“엄니가 나가지도 못하시니까 ‘쓸 데가 어디 있나.’ 했겠지.”
가만 있자. 아~니. 이건 영감이 내게 하여야 할 소리 아녀?! 암튼 엄니가 안 됐다. 허긴. 엄니 주머니가 아직 공부하는 학생들 뒷바라지 하는 따님들보다 더 두둑하실 지도 모른다. 엄니의 말씀에 따르면, 그래서 엄니의 따님들은 엄니에게 용돈 드리는 일에 인색하다 한다. 정말일까. 그래도 기분인데 좀 드리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