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초등학생의 뇌진탕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211

며느님은 왜?- 남녀평등(男女平等)과 위계(位階)


BY 만석 2010-01-30

 

남녀평등(男女平等)과 위계(位階)


  “애기 이름은 아빠가 지어 주시겠지요?”

  세상에 없는 딸을 둔 것처럼, 요새로 매일이 즐거운 큰아들의 압력이다. 그러니까 갓 나은 제 딸아이의 이름을, 할아버지가 된 제 아버지에게 지어달라는 말이다. 집안 내력으로 말하자면, 딸아이는 부모에게 작명(作名)을 위임(委任)하는 선례(先例)가 있기에 하는 말이겠다. 내 머리가 복잡하게 회전을 하는 중이다.

  “그래야겠지.”

  남편에게는 필(必)이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배가 부른 둘째 며느리가 혹시 아들이라도 낳으면, 돌림 자(字)를 핑계로 필히 집안 어른인 영감이 지어야겠기에 말이지. 큰며느리와 작은며느리를 차별한다는 소릴 들으면 큰일이지 않은가.


  딸아이들의 이름도 그리 심사숙고(深思熟考)하던 그이다. 손녀 딸아이 이름도 목하(目下) 심사(深思)가 며칠을 간다. 불이 환해서 눈을 떠보면 사전을 펼쳐놓고 이름을 찾는다.

  “밤엔 자요. 밝은 낮에나 고민 하슈.”

  사흘을 그러더니 나흘째 되는 날. 자다 깨어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2시. 여전히 남편은 책상에 앉아 열심히 글을 적고 있다.

  “거~참. 획수가 너무 많단 말이야. 이건 너무 흔하고.”

  “아이구. 머리 새겄수.”

  “이건 어때.”

  내 걱정은 귓등에 걸고 자기 말만 들으라 한다.


  나흘이 되는 날.

  “한글로 부르면 좋은데, 한문으로는 뒤 자(字)가 영 개운치 않아.” 

  “아 그럼 앞에 임금 왕(王) 변(邊)에다 쓰시구랴.”

  제법 아는 채를 했더니 반색을 한다.

  “그래. 그래야겠네.”

  저녁을 먹고 앉아서 또 이름을 그린다. 반듯하고 깨끗한 메모지에 이름 석 자를 수(數)도 없이 쓴다. 이것저것을 손에 들고 먼 거리와 가까운 거리를 만들어 들여다보기를 몇 차례. 에구~. 저러다 더 늙지.


  이럴 땐 내가 참견을 해야 한다.

  “이거 괜찮네. 아주 명필이구먼.”

  손을 뻗어 저만치에 놓인 메모지 하나를 들어서 호들갑스럽게 과찬(過讚)을 한다.

  “어디? 그거? 괜찮아?!”

  “응. 아~주 좋은데?!”

  “글도 오랜만에 쓰니까 잘 안 되네. 정말 괜찮어?”

  임금님이 하사하는 답(答書)나 되는 양, 고이 받쳐 들어 나빌네라(?).


  저녁에 아들이 퇴근해 들어온다. 며칠의 산모 뒷바라지에 행색(行色)이 우습더니 이발을 한 모양이다. 녀석의 입은 아직도 귀에 걸렸다. 이왕에 귀에 걸린 입에 하나 더 얹어주자.    수저를 드는 녀석 앞에 이름 석 자를 적은 종이를 내려놓고 기색을 살핀다.

  “뭔데요. 아, 이름요?”

  찬찬히 훑어 읽고 또 읽더니,

  “괜찮네요.”

  어째 반응이 시큰둥하다. 아주 좋아 할 줄 알았는데……. 딸아이도 오라비의 맘을 읽었는지 한 마디 거든다.

  “아빠가 몇 밤을 못 주무시고 지으신 거야. 어제도 밤 2신데 사전 들고 계시더구만.”

  “알았어요. 보여주고…….”

  제 댁에게 보여주고 결정하겠다는 뜻이겠다.


  뭐여?! 아니, 시방 몇 밤을 새워 시아비가 이름을 지었더니, 결국은 며느리의 심사를 거쳐야 하는 겨?! 그런 겨? 영감은 말이 있을 턱이 없지. 말하다 잡혀 먹힌 귀신이 붙은 양반이니께. 그러나 나는 그 마음을 읽었지. 언제는 맘에 들지 않는다고 톤을 높혀 꾸짖었던가? 흡족하다고 만족한 티를 내더냐는 말씀이야. 저 속은 탄광촌의 토굴보다 더 깊고 어두워서, 나만이 읽을 수 있다는 말이지. 속으론 씁쓸하게, ‘거~참!’했을 걸?!


  아들아.

  내 맘은 그렇다. 아무리 너희 부부가 낳은 네 딸이지만, 집안의 어른이 지어서 내려주는 이름을 마다하는 법은 없는 겨. 너희 부부의 마음이 그랬다면 차라리 어른에게 부탁을 말고 너희들 맘대로 지었어야지. 기껏 어른에게 부탁을 하고는 그걸 들고 네 댁에게 OK를 받아야 한다는 모양새는 보기에도 좀 그렇더라구. 네 아버지 맘도 내 맘일 걸? 만약, 네 댁이 딴지를 건다면 아버지에게 다시는 작명(作名)을 부탁할 수 없을 게야. 이제는 며느님이 그 이름에 딴지를 걸지 않아도,

  “에미도 좋다네요.”하는 네 말이 곱게 들리진 않겠지.

  

  아들아. 남녀평등(男女平等)? 그거 좋지. 그래서 네 댁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거, 딸을 둘씩이나 둔 엄마로서는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지. 그런데 말씀이야. 그 ‘남녀평등’이라는 것도 위아래의 서열(序列)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

  좀 전에 아기를 보러 조리원에 갔었다. 네 댁에게 전화로라도 아버지에게 한 마디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맘은 없다. 소위 말하는 교통정리(交通整理) 차원에서지.

  “예쁜 이름 지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애쓰셨어요.”라고 한 마디 더 얹으면 더욱 좋고. 워뗘. 그게 좋겄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