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이 그리운 날
두 며느리들이 주방에 들어서니 내 시어머님 생각이 난다. 아니, 내 며느리가 아니어도 명절을 앞둔 이만 때면 시어머님 생각이 간절하다. 내 나이 칠순이 지난 지 오래지만…, 그래서 더 어머님 생각이 나는가? 어머님의 칠순이 이러셨겠다 싶어서 말이지.
대가 댁 종부이셨던 어머님은 손이 크셨다. 장독대의 장은 배가 부른 커다란 장독에 언제나 가득했고, 소금도 가장 큰 장독에 가득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하셨다. 닷새마다 서는 장이 핑계이긴 했지만, 이웃에서 무엇인가 빌리러 오면 언제나 반색을 하시는 시어머님이셨다. 풍족하게 누리고 사는 형편에 대한 자긍심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나는 어머님의 외며느리다. 부족한 것 없이 사시던 어머님에게는 이것이 늘 부족한 부분이었다. 작은댁의 세 동서가 부엌에 들어서면 그때부터 어머님의 고뇌는 시작이 됐다. 작은댁의 덩치 큰 세 동서 사이에 끼인 당신의 외며느리. 외소한 당신 며느리가 늘 성에 차지 않았음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이치다. 더욱이 그녀들은 시골 살림에 길이 잘 들어 있어서, 큰댁의 부엌에서도 척척 죽이 맞았으니 더 그러셨겠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친정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밥 한 번 시켜보지도 않고 어쩌자고 대가 댁 종부 며느리로 나를 보내셨느냐는 말이지. 6.25전쟁의 배고팠던 서러운 기억이, 부농(富農)이라는 중매쟁이의 입담을 쫒았던 것이다. 친정에 가면 나는 곧잘,
“지금 세상에 배곯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리로 시집을 보냈냐”고 앙탈을 부리곤 했다.
더 어려운 건 명절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속이 깊고 둘레가 커다란 대광주리에 산떠미처럼 지져내는 전. 그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데에 내 심신은 해마다 지치고 있었다. 동태전이 그랬고 관락이 그랬고 생선전이 그랬고 또…. 심지어는 그 흔한 김치전도 대광주리를 채웠다. 정작 제사상에 오르는 건 달랑 하나의 제기접시를 채우는 게 고작이었는데 말이지.
제사를 지낼 것들을 먼저 챙기고는 숙부가 계시는 작은댁에 들려 보내야 했다. 또 일을 끝내고 나서는 동서들마다 나누어 제 집으로 들려 보냈다. 것뿐인가. 명절 다음 날부터 들이닥치는 다섯 시누의 식솔들, 다섯 사위님을 위한 상은 언제나 특별했고, 수시로 기웃거리는 생질들도 배를 불려야 했다. 시부모님을 모시는 어머님의 따님들에겐 손부끄럽지 않게 잘 생긴 것들을 골라 들려 보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정작 서울로 향하는 내 짐 보따리에는, 소쿠리 바닥에 남은 찢어지고 부서져서 보기에도 흉한 몇 조각의 전을 챙기는 게 고작이었다. 나도 사 남매나 두었으니 언제나 내 욕심엔 부족했다. 지금만 같았으면 내 것을 먼저 챙기는 억척을 부릴 만도 했으나, 그땐 감히 그럴만한 용기도 없었고, 또 그러는 건 상식 밖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시어머님 작고하신지 십 수 년.
이제야 어머님의 그 넓은 마음이 읽혀지니, 나는 어쩌면 이리도 미련한고. 그게 일 년에 두어 번 생기는 그분만의 자긍심이었던 것을. 그저 일이 많아서 힘이 든 것만 싫어서, 어머님 눈을 피해 남편에게 짜증을 내곤 했구먼. 맞벌이를 한다는 핑계로 명절 전 날 해가 저문 다음에야 들어갔으면서도 말이지. 명절이면 더 바빠지는 직업을 가진 터라, 정신없이 아이들만 챙겨 입히고 정작 나는 양말도 갈아 신지 못하고 나섰지만, 늘 좋은 소릴 못 듣는 것만 억울했다.
어머님께 잘 못한 일은 열 손가락으로도 모두 꼽을 수가 없지만, 지금도 내 머리를 찧고 싶은 일이 있다. 명절 지나고 친정나들이를 하시던 어머님께, 외할머니 몫으로 고기 한 근이라도 끊어 들려드리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그 때는 왜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내 미련이 더 밉다.
추수한 끝에 보내주시던 일 년치의 쌀가마. 당신이 직접 모 내고 타작을 하신 것만을 추리고 추려서 보내주셨다. 당신이 직접 씨 뿌리고 김을 매며 기른 배추와 무로 담근 김장. 간장 된장은 물론이고 고추장이며 온갖 장아치까지. 올망종망 콩자루는 없었겠는가. 또 팥자루는 없었겠느냐는 말이지.
아이들 많은 집엔 김치가 한 밑천이라며 바리바리 보내주셨다. 배추김치 무김치 총각김치 갓김치에 또 씀바귀김치까지. 이웃에 사는 먼 친척이,
“나도 아들 키워서 그리 할래요.”했다지? 서울의 내 이웃들은 부러워하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이야.
이제 생각하니 어머님은 화수분을 키우셨던 게다. 챙겨주고 퍼주고 보내주고도 부족한 게 더 있느냐고 늘 물으셨다. 그래도 용돈 한 푼을 변변하게 드리지 못했으니…. 그래서 나는 내 며느리들의 실수에 서운해 하지 않는다. 내 시어머님께 한 것에 비해 그녀들은 내게 얼마나 잘하는가 말이지. 고맙고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아무도 제 시누이를, 아니 내 딸을 챙기지 않는 게다. 명절 날이면 딸 부부가 온다는 건 정한 이치가 아닌가. 나도 시어머님처럼 전을 좀 더 하라 할까? 말어? 에~라. 어머님처럼 시누이 몫까지 힘들게 시킬 일은 아니지. 나처럼 속앓이를 하지 싶다.
딸 부부가 오는 날, 내가 좀 부지런을 떨자. 내가 좀 움직이면 두 며느리의 심신이 편할 것이고, 딸과 백년손님은 따뜻한 즉석 전을 먹일 것을. 두 며느리가 원하는 만큼 싸 가도록 하고 따신 전을 먹일 참이다. 그래 그게 좋겠다.
어머님. 저는 이리 삽니다.
나처럼 늘 혼자만 애쓰는 게 짠한
내 며느님. 외며느님도 아니면서...ㅉㅉㅉ.
사돈 어른들이 아시면 맘이 아프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