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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계절


BY 박예천 2014-09-12

                             바람의 계절

 

 

 


 

 대문을 나서던 아들이 주춤거린다. 갑자기 뿌연 흙모래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휘돌던 바람의 꼭대기가 누군가 내다버린 대형종이상자들과 만나 골목사이를 무서운 속도로 날아다닌다. 사방 일 미터는 족히 넘을 크기이다. 하마터면 뾰족한 사각모서리가 아이의 머리를 후려칠 뻔했다.

빌라건물 벽에 아들과 기대서서 바람의 쉼표를 기다렸다. 골목길 구석구석을 할퀴며 날아다니더니, 옆집 대문 앞으로 한 무더기 쏠려있다.

아들을 특수학교 통학버스에 태워 보낸 후 널브러진 상자들을 모아보려 안간힘쓰는데 성난 바람이 한순간도 가만두질 않는다. 마침 외출하려던 참인지 대문 열고 나오던 옆집할머니가 힐끗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전부 주워서 우리 대문 안에 던져 놓읍시다. 제까짓 게 별 수 있어? 펄럭거려도 마당 안에서만 돌아 댕기겠지!”

 

 연륜이 묻어나는 할머니의 덤덤한 한마디에 멋쩍게 웃고 말았다. 요즘 바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예전 바람의 세기를 떠올려주신다. 건물의 간판이 종잇장처럼 날아다니고 거리의 나무가 뚝뚝 꺾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열여섯 해를 이곳 속초에 이사와 살고 있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람이다. 사계절 외에 또 하나의 이름, 지금은 바람의 계절이다.

바람의 계절은 봄과 여름, 어느 중간쯤 끼어있거나 가을과 겨울 끝에 매달려있지 않다. 각각의 계절 옆에 비껴서서 함께 간다. 아니, 아예 들러붙어 숨죽이고 있다가 문득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날이면 오늘처럼 예고 없이 등장하여 횡포를 일삼는다.

 

 온갖 초록의 모가지를 비웃듯 꺾어버리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찢긴 잎사귀 끝에 겨우 맺힌 열매들도 위태롭긴 마찬가지다. 단숨에 흔들어 땅바닥으로 던져버린다. 애면글면 일궈놓은 것들을 죽이고, 애지중지 아끼는 물건들을 부숴버리는 역할만이 바람에게 주어진 불변의 임무인가보다.

 

 누가 바람을 잠시 스쳐가는 것이라 했던가. 아니다. 허락도 없이 쳐들어와 거부할 수 없는 무게를 유지하며 평생 동행해야 하는 존재이기도하다.

아들의 장애를 만나게 된 것 역시 선택이 아니었다. 녀석은 십육 년 째 내 명치 끝에서 쉴 새 없이 요동치고 있다. 순풍 부는 날엔 들뜨며 희색만면하게 되지만, 돌풍으로 불어대는 아들 앞에 서면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해 주눅 든 어미가 된다. 의연하게 끌어안고 가야 할 바람인 것을 인정하지 못해 전전긍긍 하루 스물네 시간이 조바심이다.

 

 어느 날이었을까.

미술치료를 끝내고 나오는 아들의 스케치북이 눈에 띄었다. 도화지 가득 엄마얼굴이 터질 듯 그려져 있다. 그림 옆으로 뭔가 깨알 같은 글씨체가 보인다. 언제나 그랬듯이 교사가 불러주는 대로 의미 없이 받아쓴 것이라 여겼다.

“이거, ㅇㅇ가 스스로 쓴 거예요! 엄마 얼굴 옆에 써야 한다는데요?”

치료사의 말이다. 그림 속 여자는 함지박만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옆으로 또박또박 말풍선 안에 한 줄 써 넣은 글을 읽어보니 ‘아들이 있어서 엄마는 행복해!’였다.

 

 잠들 때마다 귓가에 속삭이며 녀석에게 들려주었던 말이다. 내 인생에 찾아온 아들을 태풍으로 여기게 될까 주문처럼 읊어대며 스스로 되새기던 다짐의 언어이기도 했다.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림 안에 끼워 넣은 것이다.

 멍하니 그림을 들여다보던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목안이 뜨겁고 코가 맹맹해졌다. 어색한 목례 후 치료실을 나오려는데, 다가와 엄마 손을 잡는 아들 곁으로 바람 한 줄기가 훅 지나가는 걸 느꼈다. 아들이 있으니까 당장 행복해지라는 무언의 기운을 녀석이 흩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떠한 기상예보로도 가늠할 수 없는 풍속으로 다가와 내 인생의 바람이 된 녀석이다. 결코 스쳐지나가는 법도 없이 중앙으로 스며들어 시시때때 불어대는 바람이다.

 얼마나 더 살아야 나는, 대책 없이 불어대는 이 된바람자식을 초연한 자세로 마당 안에 들어와 쉬어가라 할 수 있을까? 분노로 씩씩 거리다 자기 살을 꼬집어대는 아들을, 날 세우지 않고 너그럽게 품어 안을 수 있는 날이 과연 내 생애 오기나 할지 솔직히 막연하다.

 

 발원지와 종착지를 모르는 이 바람의 계절 앞에서 나는 오늘도 부단히 익숙해지는 연습만 할 뿐이다. 겪어내고 부딪히며 살다보면 바람 한 조각 가둘 소박한 마당이나마 생겨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불어댈 바람이었다면, 거부하지 않고 내 전부를 맡기며 맞아 볼 생각이다.

 

숨죽이고 있던 바람이 다시 분다. 서슬 퍼런 입김을 쏘아대며 윙윙 굉음까지 동반한다. 아마도 내가 제 소리 알아듣고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될 순간까지 종일 저 바람은 입 다물지 않을 것만 같다.

 

불면의 밤, 웅크려 누운 채 나는 바람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다.

불어라, 바람!

 

 

 

 

 

2014년 문예바다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