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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래향(夜來香)앞에서


BY 박예천 2014-06-09

                          

                         야래향(夜來香)앞에서

 

 

 

  간밤에도 부실한 글 줄기를 부여잡고 씨름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메마른 감성으로 올려 세운 심지엔 불꽃 한 송이 피어나지 않았다. 가슴이 옥죄는 이 짓을 왜 멈추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내게 숙명이라 언질을 해준 적이라도 있었던가. 시간이 흐를수록 글 쓰는 일이 버겁다.

  이불속 온기를 몇 분이라도 더 누려보겠다고 뒤척이느라 바쁜 아침시간이 쪼개진다. 기지개를 켜고 비척비척 걸으며 침실 밖으로 나섰다. 해뜨기 전이라 사위가 부옇다. 눈꺼풀에 붙어있는 졸음을 털어내려는데 거실 공간 가르며 한줄기 향이 스친다. 그랬다. 분명 냄새가 아닌 꼭 향기라고 이름붙이고 싶을 만큼이었다. 향기의 근원지 찾아 구석구석 코를 벌름대며 돌아다녀본다. 마른 빨랫감 속 섬유유연제인가 했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은은한 숲의 향기가 코끝에 와 닿는다. 화분들이 즐비한 현관 근처를 지나치려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맞다, 야래향이었구나!

몇 가닥 뻗은 줄기와 잎 사이로 부끄럽게 고개 숙인 꽃잎이 보인다. 앙증맞은 흰 꽃대가 엇갈리듯 피어 수줍게 웃고 있다.

지난여름, 모기를 쫓는 화초라 하여 어렵게 구해왔으나 폭염에 잎과 줄기가 바싹 말라죽어버렸다. 뿌리는 살아 있겠다싶어 우물가에서 물을 올려줬더니 간신히 연둣빛 싹이 돋았다. 용쓰고 살아낸 게 기특하여 겨울추위 피해 거실에 들여놓았는데, 은혜에 보답하려는지 쑥쑥 키가 크더니 마침내 꽃을 피운 것이다.

‘밤에 오는 향기’라는 제 이름 속뜻을 잊기라도 한 걸까. 엉뚱한 아침에 꽃잎 열어 주인아낙을 요염하게 자신의 심연 속으로 초대한다. 냉각의 계절 끝자락에서 여린 꽃잎으로 향기를 건넨다. 지그시 눈 감은 채 꽃대 가까이 호흡 한 폭 맞대보려는데 머나먼 향내 속으로 나를 잡아끈다.

  매년 봄의 초입만 되면 목련이 봉오리 맺기도 전에 꽃보다 먼저 피어 나를 부르는 친구가 있다. 여고시절 문예반 단짝인데 잊을만하면 편지글을 보내온다. 진부한 안부의 언어들은 뒤춤에 감추고 내미는 말이 한결 같다.

‘친구야! 곧 목련이 피겠지? 글은 쓰고 있니? 네 글은 용연향 같았으면 좋겠다!’

용연향이라 했다. 친구는 거듭 그 향기를 당부했다.

‘깊은 바다 속에서 참고 참다가 마침내 수면위로 솟구쳐 올라 긴 한숨을 뿜어낼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분수로 보이듯 네 한숨과 속앓이가, 수면 위 분수와 용연향으로 변화되길 바란다!’

의지박약한 내가 삶이 버겁다고 시시때때로 엄살을 부려내니, 다독이고 싶은 위로차원의 말이었을 것이다. 인생살이 한낱 고비쯤은 참고 이겨내라는 속뜻이라고만 여겼다.

친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걸까? 그 계절 목련 앞에서 울먹이던 계집아이는 아득한 눈물의 기억조차 잊고 산다는 것을. 삼십년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만나질 순수는, 모진 풍상에 눌렸는지 때가 묻어 버렸건만 향기로운 글을 쓰란다.

  문예반을 들락거리던 그해 사월은 친구와 내가 열일곱 나이 먹고 잔디밭을 뒹굴며 팔랑거리던 때였다. 무르익은 봄은 점차 제 빛을 더해가고 나무며 꽃들이 앞 다투어 피던 날들이었다. 교무실앞마당에 봉오리 터뜨린 백목련의 자태가 일품이었다. 오가는 길, 시를 지어보겠다고 목이 뻣뻣하도록 올려다보곤 했다.

갑자기 폭설이 쏟아졌다. 높지 않은 형세의 내륙지방이었는데도 제법 많은 눈이 쌓였다. 겨울 한파 이겨내고 분홍꽃잎 열었던 진달래며 여기저기 봄꽃들이 얼음송이를 매달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내리는 눈발을 따라 들뛰고 자빠지느라 정신없게 즐겁던 사이, 훌쩍거리던 계집아이가 바로 나였다. 백목련을 물끄러미 쳐다보려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꽃잎 사이사이 얼음 배길까봐 가슴이 먼저 아리고 시려와 울었다. 향내 풍겨나기도 전에 냉랭히 얼어가던 목련 앞에서 그만 눈물 먼저 터져버리고 말았다. 왜 그런 설움이 솟구쳐 올랐던 것인지 회상해보면 희미하기만 하다. 울먹거리는 앞에서 아연한 표정으로 말없이 눈물을 닦아주던 그녀. 배려 깊은 친구는 내 속을 읽었던 것일까.

지금은 시멘트 대리석보다 더 차갑고 둔탁해진 내 감성이 열일곱 한날엔 목련자태 스러질까 울기도 하였다니 믿기 힘든 일이다. 꽃향기는 고사하고 곰팡내 풍기고 사느라 늘어져 있는데 향유고래가 품어대는 용연향을 내보란다. 참으로 가랑이 찢어질 일이 아닌가.

가슴에 상처 난 고래가 스스로 그곳을 치유하기 위해 흘린 액체들이 고여 향이 된다는 용연향. 아직 내 인생은 더 아파야하고 고통 받아야 하는가. 내면을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의 글들이 고여 향을 뿜어내려면 말이다.

 

  아득한 대륙의 땅 바람과 토양에서 태어나 긴 시간 침묵하였음에도 제 향기를 기억해 낸 야래향이 대견하여 화분 곁에 쪼그려 앉아 가만히 쓰다듬는다.

글에 향기가 없다한들 자책할 필요는 없다고 어깨를 움츠리며 주억거려본다. 글재주보다는 삶이 농익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가되면, 목련나무 아래 흔적도 없이 묻어버린 순수가 되살아나 향기를 발하게 될 것이라 위로해본다. 해마다 용연향을 졸라대는 친구성화에 못 이겨서라도 그 비슷한 냄새 나마 흘리지 않을까한다.

창틈으로 따사로운 햇볕이 친구의 편지글처럼 꼬물꼬물 새어들고 있다. 야래향 한줄기가 코끝을 희롱하듯 내 앞에서 한참이나 놀다 간다. 봄이 깨어나는 중이다.

 나는 지금 글 쓰러 간다.

    

 

2014년 에세이문학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