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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들빼기


BY 박예천 2013-10-07

 

                           고들빼기

 

 

 

황금들녘에서 풍겨오는 볏짚 냄새가 폐부 깊숙이 가라앉은 아릿한 앙금을 긁어냅니다.

그 아릿한 앙금은 옛 추억의 공간이었다가, 어느 순간 그리운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주머니 깊고 넓게 만든 앞치마 둘러메고 고들빼기를 찾아 나섰습니다.

탈곡이 한참인 논두렁을 걸어가려는데, 화들짝 놀란 개구리들이 튀어나오다 사방으로 곤두박질칩니다.

걔들 입장에서 보면 저는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이겠지요.

호미하나 달랑 들고 바람에 서걱거리는 마른 풀 섶을 헤치며 걷습니다.

땅바닥에 납작하게 드러누운 고들빼기를 발견하면 쪼그려 앉아 호미질로 캐냅니다.

앞서 차에서 내려 다른 논배미를 둘러보던 남편이 소리쳐 부릅니다.

“여보! 이곳으로 와봐! 여긴 아예 고들빼기 밭이야. 빨리 오라구!”

 

남편은 모릅니다.

정작 나는 고들빼기 욕심이 없다는 것을요.

뭉클거리는 가슴을 싸안고 어디든 걷고 싶은 구실로 고들빼기 핑계를 댄 것인데 말이지요.

밭처럼 쫙 깔린 고들빼기 무더기 앞에 주저앉으면 오히려 숨이 막혀옵니다.

띄엄띄엄 있어야 일어서 걷다가 앉다가 하는 것인데.

무슨 고들빼기김치 대량으로 담아서 팔아먹을 것도 아니건만 선발대마냥 논두렁마다 찾아다니며 마누라를 불러댑니다.

차라리 혼자 올 걸 그랬나보다 잠시 후회를 해 봅니다.

고들빼기는 뒷전이요, 제 맘은 다른 곳을 향해 흩어집니다.

좁다랗고 길게 이어진 논두렁 걸어가며 이름 모를 들꽃과 인사도 나누고 돌아온 제 나이도 더듬고 싶습니다.

빈 몸으로 맥없이 걷고 있으면 정신 나간 여자 취급을 받게 될까봐 고들빼기 캐러간다고 둘러댄 겁니다.

드넓은 논바닥을 여자혼자 휘적거리며 걷는 모습은 어쩐지 볼썽사나울 것도 같아서요.

 

되도록 세워둔 차와 남편이 있는 곳에서 멀리 걸어갑니다.

일부러 남편이 알려준 논두렁을 외면합니다.

고들빼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곳만 골라 겅중거리며 뛰어갑니다.

엉뚱한 행동에 남편의 목소리는 더욱 톤이 높아집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거긴 하나도 없다니까? 여기로 오라니까!”

참으로 바보 멍청이 같은 남자입니다.

가을만 되면 기분 가라앉는다며 산으로 바다로 홀로 다닐 때 묵인해줬던 아내인데,

모른 척 좀 해주면 좀 좋을까요?

정말이지 누구말대로 입장 바꿔 단 한 번도 생각하기 싫은 남편인가 봅니다.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작업반장(?) 남편이 지적해 준 논두렁에서 고들빼기 양을 늘립니다.

가져간 비닐봉지가 터질 지경으로 많습니다.

대충 수돗물에 흙덩이만 털어냈습니다.

저녁 먹고 광주리에 가득한 것을 다듬어야 할 일이 또 숙제로 남네요.

꼼지락거리며 다듬는 아내 앞에서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구시렁거립니다.

“그걸 언제 다 다듬을 거야? 힘들면 쉬었다 내일 하지!”

“나둬요 내가 다 할 테니!”

미안했는지 옆에서 거들겠다고 시든 잎과 검불을 떼어내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했을까요.

“도저히 안 되겠다. 손이 불었어!”

참 나 기가 막혀서!

겨우 그 정도에 손이 불었다면, 나는 손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겠다고 대꾸를 해줍니다.

자정 무렵이 다 되어서야 고들빼기 다듬는 것을 끝냈습니다.

쓴물이 빠지라고 큰 함지에 물을 채워 놓습니다.

쌉싸래한 맛이 전부 빠지면 특유의 맛이 없어지지요.

하루정도 지나 소금물에 또 삭혀줘야 고들빼기김치 맛이 제 격을 갖추게 됩니다.

 

다음날인 오늘아침.

설거지 끝내면서 함지 안에 담긴 물을 손가락 끝에 찍어 혀에 묻혀봅니다.

쓴맛이 느껴지네요.

내가 겪었던 인생 쓴맛들도 이젠 삭히고 우려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가슴에 꼭꼭 숨겨두지만 말고 허공에라도 희석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더 깊은 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순서이니까요.

고들빼기김치가 제 맛이 들면 입안에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겠지요?

쓴맛, 단맛, 쌉싸래한 맛, 매콤한 맛까지 섞인 제 삶이 발효되는 날도 곧 오려니 기다려 봅니다.

 

점심때가 다 되었네요.

혼자 받는 밥상이니 내 맘대로 가을 한 젓가락씩 올려 먹을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