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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콩밭에 (3)


BY 박예천 2011-05-24

 

         마음은 콩밭에(3)

 

 

 

노인의 안부가 궁금해진 것은 온 사방 두엄 썩는 냄새 가득하던 사월 초입이었다.

변두리 한 구석 자리 잡은 콩밭에 뭔 별일이 생기겠냐만, 오가며 넋 나간 듯 바라보곤 하였다.

운전하다 멈춰 신호대기 짧은 순간 눈도장 찍는 정도인데도 콩밭은 의례 나의 신경에 와 닿는다.

겨우내 내린 폭설에 꼭꼭 묻혀 자리를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던 곳.

비로소 속초 된바람이 거센 제 역할에 나서자 노인의 밭도 봄 몸살을 앓는다.

가물어 메마른 땅이 되어 아예 물기라곤 찾아 볼 수가 없다.

갈라지고 흙먼지 가득한 밭뙈기를 들여다보는 날엔, 자꾸 노인의 푸석한 얼굴이 겹쳐진다.

주인마냥 등 굽고 건조해져 살비듬이 곳곳에 먼지로 날아다니기 때문인지 밭은 윤기가 없다.

 

 

콩밭에 마음 빼앗겨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 벌써 삼년 째다.

콩 이삭 좀 주워보겠다던 다부진 첫 욕심은 해가 바뀔수록 희미해져가고 있다.

이따금씩 망상에 빠져있거나 머릿속은 또 다른 잡생각으로 나만의 콩밭을 갈아엎고 있는 중이다.

일궈놓은 내 상념 빈 밭엔 중국 어느 사막에서부터 시작되었다던 이국의 황사먼지만 시시때때로 불어댄다.

노인의 말라비틀어져가는 콩밭 중앙을 나의 속내인 듯 견주며 거울보기 하는 요즘이다.

 

 

갑작스레 내렸던 춘설마저 녹아내리자 노인의 밭 가득히 돌덩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많은 돌들을 누가 던져두고 갔는지.

애초에 자갈밭이었단 말인가.

손바닥크기 떡돌부터 예닐곱 아이의 주먹만 한 잔돌들이 밭 전체에 가득하다.

과연 흙 한줌이라도 만져지기나 할지 의문이 생길 정도의 돌밭이다.

푸른 콩잎 가득했던 땅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성립되지 않을 밭의 맨 몸을 본다.

이끼 한 오라기 걸치지 못한 빈곤이 밭 언저리마다 꾸역꾸역 설움 깊게 묻어나왔다.

쇠잔해져가던 기력은 결국 검불 되어 스러지고 말았나보다.

아지랑이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5월로 접어들어도 노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양 옆으로, 길 앞으로 다른 밭 사람들의 모종을 나르는 손길이 분주하고 검은 비닐 펄럭이건만 노인의 콩밭만 깊은 잠에 빠져있다.

작년 늦가을에 본 그림 한 폭이 생애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만 흐릿하게 정수리로 흘렀다.

촘촘히 박힌 돌들이 노인얼굴에 피어난 검버섯 숫자였을 거라는, 근거 없는 막막한 계산도 해본다.

저세상 먼 곳으로 떠났을 추측만 부옇게 가슴을 채워가고 있었다.

묵정밭 되어 도시 한 중간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라는 한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세상인파에 섞여 흘러가되 끝내 역류하는 내 꼴이지 싶다.

 

 

몇 번의 장마기운 흡사한 봄비가 항구도시를 질척하게 훑고 지나갔다.

습해진 기운 털어내며 평소처럼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차창 밖을 보던 어느 날이었을까.

자갈밭 한 가운데 휘어진 노인의 허리가 곡괭이자루를 지탱하고 사람인(人)자로 서있다.

숨이 차는지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고 있다.

아! 그날 나는..., 와락 반가움이 밀려와 하마터면 차에서 뛰어내릴 뻔 했다.

긴 괭이자루가 잠시 내 눈에 지렛대로 보였다.

괭이 날 쇳소리가 돌밭과 닿을 때마다, 땅바닥에 쓰러져 누우려는 노인의 몸을 튕겨 올려 세우는 것만 같았다.

 

 

그게 다였다.

콩을 심든, 돌밭을 갈아엎든 노인의 존재는 밭에 그저 점으로만 찍혀도 완성작이다.

자세히 세어보니 대 여섯 그루 가느다란 줄기 묘목을 밭 가장자리에 심고 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파르르 떨다가 가지가 꺾일지도 모르겠다는 새로운 근심거리하나를 내게 또 넘겨준다.

쟁기 부릴 기운도 없고, 괭이나 호미로 갈아 놓을 일마저 힘에 부쳐 나무 몇 그루로 흙과의 첫 대면을 시도하려나.

빈 밭으로 남겨두기 미안해 뭐라도 심으려고 나무를 택한 것인지.

메마른 육신이지만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싶었던 걸까.

아니 어쩌면, 노인은 나무마다 이름 붙여 망망대해에 희망의 깃발 꽂은 쪽배 하나 띄우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일 새벽미명마다 벅찬 하루를 걸어두려는 나의 기도가 그러하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과 콩밭은 내 속에 더욱 깊이 각인되어, 오 헨리의 작품 ‘마지막 잎새’로 자리하고 있다.

더 이상 풍파에 찢겨 메마르지 말고, 오래도록 푸르게 펄럭이라!

 

헌데, 콩은 언제쯤 심을까?

 

 

 

 

2011년 5월 24일

콩밭에 우뚝 선 노인을 바라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