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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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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어찌개


BY 박예천 2011-02-21

 

           섞어찌개

 

 

또 그만큼씩이다.

매번 이런 식으로 냄비마다 같은 분량의 찌개가 남는다.

정성들여 달인 육수로 끓인 것이라 버리기엔 아깝고 다시 상에 올리자니 내키지 않는다.

이럴 땐, 음식분야의 고수인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방법을 써먹으면 된다.

일명 섞어찌개를 끓이는 거다.

하루 전날 저녁부터 모인 세 가지 찌개가 한 냄비 속으로 무자맥질을 한다.

부대찌개, 된장찌개, 두부전골을 모아 뒤섞으니 그 모인양이 푸짐해진다.

 

할머니가 그랬다.

입김도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춥다’는 말조차 조각조각 얼어버릴 것만 같던 혹한.

부엌살림이 잠시 안방구석 무쇠화로 옆에 자리 잡는다.

스텐그릇과 수저만 함지박물에 씻겨 교환되고 상차림은 종일 그대로다.

아침, 점심에 먹던 찌개를 한 솥에 모으는 할머니.

가족 중 누군가 눈살 찌푸리고 그게 뭐냐고 싫은 소리를 내 쏜다.

각자 여러 말들을 내 놓더라도 할머니 대답은 오직 한마디였다.

“괜찮어! 먹어두 안 죽어!”

겨우 죽지 않기 위해 마련한 섞어찌개였겠지만 맛은 기가 막혔다.

뭐라 떠 올릴만한 단어가 궁색할 만큼 깊게 우러난 맛이다.

나머지 부족한 간은 상위에 남은 김칫국물을 따라 부으면 해결되었다.

 

할머니께 전수(?)받은 섞어찌개에 밥 한 공기를 다 비우고 나니 포만감인지 춘곤증이 찾아온다.

격자무늬 창안으로 이른 봄볕이 쏟아진다.

꾸벅이며 졸고 있는데 꿈인 듯, 아지랑이 퍼지는 듯 할머니가 아른거린다.

 

설 명절을 맞아 친정 들렀다가 할머니 계신 요양원엘 갔었다.

가슴 저미도록 피골이 앙상한 모습에 목울대가 뜨거웠지만 꾹꾹 눈물을 넘겼다.

죽인지 국말은 밥인지 막 잡수시는 중이라 가만히 곁에 앉아있는데, 자꾸 내 얼굴을 보더니 하시는 말씀.

“너두 뭣 좀 먹어야지!”

당신의 기억 속 손녀딸은, 어미젖 부족하던 영아기적 배곯이를 여태 하고 있나보다.

같이 갔던 막내 동생을 알아보시곤 또 뭣 좀 먹어라 한다.

좋다, 감사하다는 말만 연거푸 하다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을 흥얼거린다.

할머니음성 뒤를 따라 2절까지 목청껏 마저 불러드렸다.

매정한 세월만 얄궂고 어찌 할 수 없도록 무능력한 나의 현실도 갑갑해졌다.

물 흐르듯 인정하고 포용하고 살아야 한다지만, 느슨하지만 않은 것이 또한 인간사다.

 

지난 시절 남은 찌개들을 한 곳에 모아 끓였던 할머니를, 나는 다시 가슴으로 읽는다.

탈도 많고 말썽 많은 날이 왜 없었겠는가.

앞서 보낸 자식이 넷이나 되는데, 애간장 녹고 정신인들 아프지 않았으랴.

그렇다 할지라도, 남겨진 피붙이들일랑 섞여서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고 화롯불 온기에 푹푹 끓여주신 거다.

아침상에 올렸다가 남겨졌던 먼저 세대이거나, 점심두리반에서 물러나온 젊은 나이들이거나 불평 없이 섞여 가족 사랑을 면면히 이어가라는 일침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양원 손바닥만 한 방바닥에 작게 구부러져 누운 할머니를 보다가 징징 떼쓰고 싶어졌다.

기운내서 딱 한번만 일어나 당신 자손들 불러 모아 호된 회초리 때리고 잘 버무려 주십사 라고.

우선 나부터 잘게 부서지고 녹아져 들들 볶다가 무쇠 솥에 푹 끓여 달라고.

언제쯤이면 다들 따로국밥 신세를 면하고 제대로 섞여질까.

 

 

온다. 기어코 봄은 오고 만다.

저만치 겨우내 쌓였던 설악산 잔설의 냉기 속에서도.

 

내가 꿈꾸었던 그 봄날도 반드시 오리라는 소망 한 꼭지만,

간절하게 남겨두기로 한다.

 

 

 

 

 

2011년 2월 21일

섞어찌개 끓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