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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베개


BY 박예천 2010-11-04

        

             들국화베개

 

 

 

처음엔 향기였다.

눈을 감고 있어도 노란 단내가 상상될 만큼 기분 좋은 국화향이 흘러나왔다.

며칠 지나자 향기였던 것이 점점 냄새로 바뀌어간다.

오늘아침엔 가을 볏짚에서 맡아지던 마른풀냄새가 났다.

 

지난번 속초나들이 오셨던 시어머니가 산책길 야산 입구에서 따 모은 들국화 송이들이다.

젊어 한 때 논일밭일 하던 솜씨로 노란 모가지들을 비틀어 부지런히 담으셨다.

나들이용 돗자리 깔고 추수한 낟알 펼치듯 국화꽃잎들을 날마다 말렸다.

행여 이슬이라도 맞을세라 햇볕에만 펼쳐놓았다가 저녁기운 이슥해지면 오므려 담곤 하였다.

잘 마른 꽃잎무더기가 소복하게 쌓여 베갯속을 할 만큼의 양이 되었다.

양파망 한 개를 빨아 빨랫줄에 걸어 말려두었다.

자루그물망에 바삭바삭 들국화를 담고, 입구는 박음질로 단단히 꿰매었다.

소창 한 폭 알맞게 잘라 다시 한 번 성근 망에 담긴 그것을 싸매준다. 마른 꽃가루가 그물 틈으로 술술 새어나오기 전에 입막음을 해두자는 차원이었다.

마지막 단계로 오래전 만들어 두었던 분홍색 쿠션커버를 씌워 마무리 했다.

흡족한 웃음 지으며 코를 베개에 바싹 들이대고 숨 고르기 해봤다.

향이 정말 근사하다.

 

애초에 생각은 그랬었다.

“자기야! 이거, 어머니 드리자! 힘들게 따 오셨는데 그게 좋겠지?”

당연지사 아니겠느냐고 내 말을 듣던 남편도 대 만족한 표정이다.

달랑 베개 하나에 일등효부가 되었다.

딱 하루만 베고 누워보자 했다. 어떤 느낌인가 알기만 하면 된다면서.

향기 때문이었을까.

첫날밤은 꿈속에서도 가을들판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고향들녘이었는지, 읽고 있던 소설 속 배경이었는지 기억에 없었으나 여기저기 꽃 향이 넘치고 있었다.

이른 아침, 눈뜨자마자 방문을 나서는 내 머리칼에서 들국화향이 난다.

일부러 좌우로 흔들어 봤다. 단발머리 찰랑거릴 적마다 슬쩍슬쩍 향기가 지나간다.

괜히 어머니 드리자고 선수쳤나보다. 하룻밤사이 만리장성 쌓은 정이라도 들었는지 들국화베개가 은근히 탐났다.

사실, 베개 하나 더 만들자고 들판마다 다니며 다시 국화 모가지 비틀어댈 기운도 나지 않을 만큼 귀찮은 요즘이기도하다.

나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계속 들국화베개에 곤한 머리를 기대고 잤다.

고질병인 두통도 낫겠거니, 이참에 얼기설기 엉키어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겠거니 기대하면서 말이다.

잠자는 내내 은은한 향기가 스며들어 치료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눈만 뜨면 탁한 안개 속을 헤매던 머릿속이 맑아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들국화베개 덕인지 아니면, 때가 되어 저절로 낫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저녁밥 차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안부를 묻는 시어머니 목소리가 차분히 들려온다. 총각김치 버무려놨으니 필요하면 가져가 먹으란다.

“어머니! 들국화베개 말예요. 정말 효험이 있나 봐요. 신기하게도 머리가 맑아지던데요. 어머니 드리려고 잘 만들었는데 제가 먼저 며칠 베고 자봤어요.......호호호!”

속보이게 둘러대는 며느리를 향해 무슨 소리냐며 하시는 말씀.

“그거 너 만들어 주려고 따 모은 거다. 네가 자주 머리 아프다고 했잖어. 두통에 좋다니까 잘 베고 자거라.”

소인배 같은 며느리 마음 씀씀이가 당장에 부끄러워졌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배려 깊은 척, 어른 제대로 섬기는 척 하다가 어머니께 한 방 먹고 만다.

 

 

날마다 알람시계보다 앞서 나를 깨우는 것이 마른 풀냄새다.

눈꺼풀 열리기도 전, 코끝에 먼저 와 닿는 들국화 냄새다.

나이를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이별이라서 계절 뒷모습 대하는 일에 아직도 서툴다.

해서 나는 머리맡에 가을을 오래오래 모셔두기로 한다.

천지사방 얼어붙고 폭설이 잦아들더라도 베개 속에 갇힌 들국화 향은 한동안 내게 철지난 가을이나마 일깨워 줄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삶이면서, 특별한 아픔들만 골라 겪느라 고단했을 머리라도 누인 채 쉬라 하겠지.

꼭 내 머리통 무게만큼 푹 꺼진 베개의 자국을 들여다본다.

베갯속 꽃기운이, 오래 묵은 몹쓸 두통까지 제발 훑어갔으면.

 

 

오늘도.....,

종일 내 머리카락 속에서는 들국화향기가 흔들리며 헤엄쳐 다닌다.

저만치 가을은 달음박질치고 있는데.

 

 

 

 

2010년 11월 4일

들국화베개를 베고 잠들던 여러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