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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곰띠다


BY 박예천 2010-10-01

   

        나는 곰띠다

 

 

 

도대체 얼마나 잤을까.

시장기를 해결하고자 아침 겸 점심으로 몇 술 뜨다 만 것만 기억난다.

설거지통에 빈 그릇을 던져놓고 쇼파에 쓰러지듯 누운 것 같은데.

비몽사몽 실눈 뜨고 괘종시계 분침을 바라보기도 했었지.

아직은 아니야, 더 자도 되는 걸.

중얼대다 다시 스르르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낮 두시 반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가위 눌리듯 의식은 명료한데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옆집 사람들의 철 대문 여닫는 소리도 들었다. 달마티안을 목 터져라 부르는 골목끝집 여자의 앙칼진 음성도 고막사이로 비집고 들어오곤 했다.

밤새 뭔 짓을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넘치게 잤다.

헌데, 아홉시 뉴스를 알리는 시그널뮤직이 울려 퍼지는가 싶게 눈꺼풀 먼저 감겨 온다.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잔다.

그것만으로도 내 잠은 부족한 모양이다.

아들의 치료실을 따라다니며 주차장 한 모퉁이 세워놓은 차안에서도 꾸벅거린다.

잘 펼쳐든 책을 가리개 삼아 얼굴 앞에 세우고 좌우 혹은 상하로 고개가 흔들린다.

다음 행선지로 옮겨가느라 눈을 비비고 양 미간에 힘 주어본다.

마치 꿈속을 헤매듯 운전하는 핸들도 차체도 공중에 붕 뜬 기분이다.

아니, 수중을 헤엄치는 물고기 위에 올라앉았다고 해야 맞을까.

 

 

벌써 일주일이 넘게 나는 잠과의 한판 승부중이다.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루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몸에 이상이 있을까 의심해볼 여지는 없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경체계가 스스로 알아서 움직인다.

잡다한 일이 생기거나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올 때, 나는 잠만 잔다.

일부러 작정하고 청하는 수면은 아니다. 저절로 잠이 쏟아진다.

지나치게 자서 두통이 심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진통제 따위는 먹지 않는다.

진한 커피 한 잔이면 족하다.

지끈한 머리를 흔들어보며 관자놀이 부분에 엄지손가락 대고 힘주어 눌러댔다.

옷깃에 닿는 바람무게가 서늘하다. 내친김에 입 속에도 빨대 힘으로 바람을 넣는다. 잠 냄새를 헹궈내는 중이다.

마신 바람 한 줌 내쉬며 몸에 가득할 잠 비듬도 털어내 본다. 그런다고 졸음이 가시려나.

버리고 싶은 것이, 잊어야 할 것들이 아직 남아있는 것을.

 

내 몸 자체운영시스템이 작동한지 여러 날 되었으니 종지부를 찍을 날도 머지않았다.

눈감고 명상의 시간이나마 가져보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겠는데, 어찌 골아 떨어져 자는 꼴이 되는 걸까.

부부싸움 끝에 해결되지 않는 감정을 끌어안고도 쿨쿨 잔다.

자고나면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밤새 열병 앓다가도 아침이면 깨끗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희망을 갖는 것처럼.

 

잠은 정지가 아니다.

멈춰있는 듯 하지만 쉼 없이 변화하고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병상의 환자에게도 밤새 치유의 손길이 머물고, 감정의 골 깊은 사람들도 잠 깬 후 각별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생각을 곱씹고 되 뇌이며 새 길로 들어서는 거다.

 

분명 내 길고 깊은 잠에도 이유가 있으리라.

다 접어버리고 포기하며 도피하고픈 무책임과 체념의 잠이 아니기를 변명해 본다.

추위를 피하고자 동면에 들어가기 원하는 동굴 속 곰은 아니겠지.

피둥피둥 욕심의 살로 기름기 늘리고 입 닫은 채 무의미한 잠을 부르고 싶지는 않다.

깨고 나면 뭔가 실마리가 풀리겠지 한다.

 

아! 그래도 나는 어쩐지 곰만 같다.

미련함의 극치로 뒹굴 거리며 잠꾸러기가 되어가고 있으니.

이러다 누가 물으면 대답 먼저 툭 튀어나올 거다.

“나는요, 곰띠예요!” 라고.

 

 

 

2010년 9월 30일.

잠에서 빠져나오고픈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