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자마노인
꽤 여러 날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골목끝집 철 대문계단 아래 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쭈그려 앉아있던 노인.
꾸부정하게 서 있으면, 그 유명한 K치킨 하얀 할아버지 동상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온통 백색인 머리카락도 그렇고 자그마한 키와 적당히 살집이 붙은 체구가 안경 낀 치킨할아버지를 연상시켰다.
정지된 그는 담벼락에 조각된 벽화였다.
손가락 검지와 장지사이 담배개피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노인의 실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매일 아들을 등하교 시키며 차창 밖 눈길로 꼭 짚어야 하는 그림이다.
노인의 옷차림은 항상 후줄근했다.
목판화로 찍은 듯 한 갈색무늬가 겹세로줄 사이마다 열을 지어 파자마바지에 찍혀있다.
헐렁하게 목 늘어난 흰색러닝셔츠 사이로 가슴이 훤히 보였다.
대문 앞 첫째계단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허공을 바라본다.
지나가는 사람들, 오가는 차량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한다.
이따금씩 골목길 쓰레기더미 휘젓는 도둑고양이의 움직임을 조심스레 살피는 날도 있다.
그런 노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는 또 한사람은 바로 나다.
정작 내 눈길은 의식되지 않는지 뚫어져라 한곳만 바라보고 있다.
공원길로 이사 온 이후 나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당사자임을 까맣게 모르는 태도다.
바로 옆집도 아니고 길게 이어진 공원길 시작지점 가장 끝집 안의 실정은 더구나 알 턱이 없다.
나의 궁금증은 증폭되기 시작했다.
가족관계도 그러하고 하릴없이 붙박이로 앉아있는 노인이 깊은 병중에 있는 것 아닐까.
여러 생각이 얼기설기 거미줄을 친다.
다가가 인사라도 해볼까 잠시 고민해봤다.
저 꼭대기 집 애기엄마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아니면 빌라맞은편 집이라고 설명할까.
사실 내겐, 달리던 차를 세워놓고 내려 아는 척 할 넉살도 없다.
혹여 말이라도 건네면 이때구나 싶어 노인 쪽에서 괜한 말들을 늘어놓지는 않을지.
좀 귀찮아지는 상황이 펼쳐질까 쌩쌩 지나쳐버렸다.
노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교복(?)인양 단벌 파자마바지를 입고 앉아있었다.
번화한 대로주변도 아니고, 겨우 차 한 대 지나다닐 주택가에서 보게 되는 행인이라 봤자 뻔하다.
아침 일찍 일터와 학교로 나갔다가 저녁이 되어 자신의 둥지로 깃드는 사람들.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인적이 드문 골목이다.
이따금씩 산지직송 신선함을 외치는 소형트럭 장사꾼의 메가폰 소리만 앵앵 거린다.
누구하나 멈춰서 노인의 말벗이 되어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노년이 외로움덩어리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아도 읽을 수 있었다.
세월깊이가 새겨진 안색도 그러하고, 원래부터 백색이었을 리 만무할 머리칼도 많은 사연을 짐작케 한다.
온 몸의 기름기와 물기가 전부 빠져나가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모습.
나는 적잖이 가슴 깊이가 술렁거리곤 했다.
한여름 폭염에도 간간히 부채질로 땀 식히며 서 있던 노인이었다.
근 한 달간 노인이 부재중이다.
뚜벅거리고 걸어가 대문을 밀치며 노인의 상태를 묻고 싶은 조급증이 나기도 한다.
단순한 오지랖 발동일까.
공원길 그림 한 폭을 순조롭게 채워가던 노인의 자리가 허전하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이 제자리에 물건들이 있어야 안심하는 아들의 장애증세를 닮기라도 한 것인가.
나는 불안하다.
그 집 철 대문 앞을 스칠 적마다 깊은 몸살이었을 노인이 탈탈 털고 늘 있던 자리에 서 있기만 은근히 바라고 있다.
목례라도 한번 나눈 적 없는 마을사람 중 한 사람인 노인을 말이다.
가을이 깊다.
이젠 파자마 헝겊두께로는 오스스 한기가 전해질 기온이다.
무릎 나온 운동복 바지라도 걸쳐 입고 노인이 제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한다.
눈을 드는 곳마다, 귀가 열리는 방향마다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생겨나고 병색 깊어진 소식이 전해지니 가슴이 휑하다.
내가 사는 공원길 백발성성한 그 노인이라도 멀쩡했으면 좋으련만.
오가며 지켜보다가 노인이 서 있는 날 다가가 소리 높이리라.
안녕하셨느냐고.
제발 오래오래 안녕 좀 하시라고.
2010년 9월 15일
파자마 노인이 궁금한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