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만 때려줬으면
가족 간 대화는 주로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집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밥 한술 입에 넣고 씹으며 주거니 받거니 여러 말들이 오간다.
낮 동안 학교와 집안에서 만난 사람들, 있어진 일들을 나누며 웃는다.
때론 얼굴 붉히기도 하고, 어떤 얘기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적도 있다.
장애아들 몫까지 재잘거리며 윤활유가 되어주는 것이 딸아이의 이야기다.
묻지도 않은 말들 쏟아놓느라 엄마와 아빠얼굴을 번갈아보며 정신없이 수다스럽다.
주말 점심식탁에서도 딸아이는 변함없이 수업 중 있었던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아빠! 자폐아가 있는 집에 정상인 형제가 함께 살면 장애아를 따라한대!”
“누가 그래? 그게 뭔 소리야?”
국물 떠먹던 숟가락을 입 가까이 댄 그대로 남편은 놀란 눈이다.
물론 나 역시 어리둥절 입이 떡 벌어졌다.
“응. 있잖아. 우리 가정선생님이 오늘 수업시간에 그러셨어. 자폐아 있는 집에 정상인 아이가 같이 자라면 그 애도 장애인의 행동을 따라하게 된다구. 그리고 그런 장애아는 같이 키우지 말고 따로 격리시켜서 자라게 해야 한다는데?”
“그래서 넌 어떻게 했는데?” 내가 물었다.
“수업 끝나고 친구들 앞에서 내가 그랬지. 얘들아! 내동생도 발달장애인데, 그럼 나도 장애인이니? 했더니 보던 애들이 선생님 정말 어이없다고 막 웃더라구.”
밥을 먹던 딸아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남은 밥을 먹었다.
만약 딸에게 말했다던 그 여선생이 곁에 있다면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장애아 어미로서의 돌발적 폭행이 아닌 정신 차리라며 일격을 가했을 거다.
귀가 따갑도록 장애단체에서 내세우는 말 중 하나가 ‘편견 없는 세상’이다.
남보다 더 잘 대해 준다거나, 항상 보호만 해 달라는 말도 아니다.
평범하게 바라보는 시각, 그것부터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우선 딸아이 가정선생의 실수를 지적하자면, 용어의 사용에서부터 잘못되었다.
장애인을 집안 다락방에 숨겨두고 쉬쉬했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현 시대는 달라졌다.
세계적으로 인식도가 바뀌고 장애인에 대한 의식이 변화되고 있다.
매스컴과 각종 홍보물을 통해서도 들려오는 말들인데 그 선생은 몰랐다는 것.
아이들 앞에서 장애인과 ‘정상인’이라고 표현했다는 자체가 본인의 무지함을 나타냈음이다.
나는 이 ‘정상’이라는 말에 전부터 예민하게 자극받고 있다.
흔히 병원진찰 마친 후, 아무 이상 없음을 밝힐 단어로 사용하기는 한다.
각종 검사 후 병에 감염되지 않았다고 규정지을 때 정상이라는 말을 쓴다.
허나 장애를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 언어를 ‘정상인’으로 이름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했을 신의 입장에서만 할 수 있는 판단이 바로 ‘정상’이니 ‘비정상’이라는 구분 아닐까.
감히 동급의 인간이 다른 존재를 향해 자기들끼리의 잣대로 정상이다, 아니다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흔히 장애인을 향해 ‘장애우’라며 친근하게 부르기도 한다. 혹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장애의 유무로 나뉘는데, 딸아이 선생은 정상인이 어떻고 라는 식의 표현을 썼다.
아이들 앞에서 바르지 못한 용어의 사용만으로 벌써 장애인을 편견으로 대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차별은 성립된다.
또 한 가지,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수업 듣는 아이들 중 장애형제와 생활하는 가정도 있다는 사실을 조심했어야 한다.
당장 우리 딸아이의 경우도 부모의 말과 수업내용이 전혀 일치하지 않으니 의구심을 품은 거다.
네 동생은 너와 다를 뿐이고 장애가 흉도 아니요, 걸림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가르쳤다.
이것을 한 순간에 묵사발 낸 딸아이 학교의 가정교사 한 대 때려줬으면 한다.
말로해도 알아듣겠지만, 성질 급한 나는 손이 먼저 올라갈 것이다.
아들이 3학년 때이던가.
하교시간이 임박하여 차로 데리러 간 적이 있다.
교문 옆 담장에 주차해놓고 운동장 안을 들여다보니, 마침 녀석의 반이 체육수업중이다.
혹시라도 아들이 보일까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매트 깔아놓고 줄서서 한 아이씩 앞구르기를 하고 있었다.
열 두어 명쯤 되는 아이들을 자세히 쳐다봐도 그 속에 아들의 모습이 없었다.
당황해진 나는 두리번거리며 학교 시설 곳곳을 살폈다.
높다란 철제 정글짐위에 한 녀석이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아들이었다.
혹시라도 내려와 다른 곳으로 가려는 행동을 보이면 호루라기 불며 매트 위 아이들 바라보던 선생이 녀석에게 손가락질로 가만히 있으란다.
숨어 보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순간 못 볼 것을 본 것 마냥 움찔해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도 우연히 운동장 체육시간에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뜀틀과 훌라후프 내놓고 줄지어 활동하는데, 아들은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 있거나 철봉에 팔을 걸고 혼자 있는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당장 도움반 교사에게 전화를 넣었다.
“선생님! 지금 유뽕이 운동장에서 체육수업 받는 것 보이시나요?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매번 담임선생님은 왜 아이에게 뭔가 시도하지 않는 겁니까? 다른 아이들 열 번 구를 때, 저 녀석 한 번만 굴러도 됩니다. 방법을 알려주고 시키면 할 텐데....,어쩌면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고 교문밖에 나가지 않게만 지키고 있나요. 아무데도 못 가게 가둬놓고 몸 다친 곳 없으면 엄마가 만족할 거라 생각하시나 봐요? 옷을 찢겨 와도 좀 다친 곳이 있더라도 저는 내 아들이 학교라는 곳에서 뭔가 한 가지라도 하고 왔구나 느끼고 싶습니다.”
흥분되어 말을 마쳤으나 가슴이 뛰고 목울대가 뜨겁게 떨렸다.
일이 있은 후부터 뒤늦게나마 아들은 도움반교사와 체육수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꼭 부르짖고 목에 핏대 세워야 뭔가 움직임을 보이는 한심한 사람들.
현 상황이 이렇다.
당당하게 살아보려 애써도, 제도와 사람들 생각이 실망 주는 한도에 머물러 있으면 나는 자책하게 된다.
멈췄던 팔자타령과 운명을 다시 거론하게 된다.
너는 뭔 죄가 있어 내 속에서 태어나 장애를 지녔느냐.
지지리 복도 없는 놈아 네 팔자를 어찌할꼬.
인생 다 산 여자마냥 세상 탓하고 시대를 슬퍼하게 된다.
하여간, 교육계에 소속되어 밥값이나 제대로 하고 있을지 의문되는 사람들!
제발 아이들에게 지식만 전달하면 된다는 편협 된 생각 좀 버리기 바란다.
바른 의식, 본이 되는 교사의 태도가 우선시 되어야 수업 받을 맛이 나지 않겠는가.
존경심이라는 것 좀 필수요건으로 갖춰가며 학생들 앞에 선다면 금상첨화일 거다.
작은 화초에도 정성들이건만, 사람 키우는 직업에 자긍심을 갖고 임해 주었으면 한다.
당장 퇴근해 돌아올 내 남편부터 꿇어앉히고(?) 제대로 가르쳐야겠다.
국어수업이 중요하지만 인성교육에도 게으름피우지 말라고.
마누라 말을 들을지 모르겠지만, 태도 불량하면 한 대 때려 줄 거다.
딸아이의 가정선생과, 아들을 내 던져 놓았던 그 담임도 불러와 묶음으로 두들겨 팼으면 좋으련만.
휴! 상상만으로도 속이 후련해지네.
2010년 9월 6일
패주고 싶은 칠뜨기 선생들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