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색 사건
결혼날짜가 정해지고 함속에 넣는다며 필요한 화장품을 말하란다.
이미 새로 구입한 세트가 있어, 대충 색조화장 몇 가지만 부탁했다.
메모지 준비하는지 전화 속 남자는 잠시 주춤하더니 천천히 받아 적는다.
“어? 아이섀도 신상품으로? 또 뭐라고? 립스틱하구 마스카라? 그렇게 적으면 되는 거야?”
틀린 철자법이라도 있을까 재차 확인을 한다.
“다 받아 적었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파운데이션 중간색으로 하면 돼.”
“뭐? 무슨 색? 다시 말해봐!”
“내 말 안 들려? 중간색!”
“아니 무슨 색깔이름이 그런 게 있냐?”
“여자들 화장품은 그렇게 말해. 화장품코너에 가면 다 알아서 줄 거야!”
여기까지는 좋았다.
남자가 알았다고 하던지, 여자 쪽에서 그럼 파운데이션은 사지 말라고 했으면 얘기가 깔끔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화약에 성냥불을 그어대며 타오르기 시작한다.
“야! 정확히 말해야지. 초록색이면 초록이구, 빨강색이면 빨강 인거지, 중간색은 또 뭐냐구?”
“아휴 답답해! 그냥 가서 말하면 다 알아서 준다구. 자기 정말 왜 그래?”
“사람을 왜 이상하게 만들어. 만약 거기 가서 판매원이 중간색은 뭐냐 물으면 내가 대답을 어떻게 하냐구. 나 자신이 그 색을 모르겠는데. 제대로 알아야 설명을 해줄 거 아냐!”
정말 팔짝팔짝 뛸 노릇이다.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꼼꼼한 구석이 상당부분 있는 성격의 남자라는 것을.
허나 이번엔 정도가 심하다.
중간색이라는 색깔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는 거다. 자신이 모르는 색을 화장품코너 판매원이 묻기라도 하면 뭐라 할 말이 없다는 것.
전화통화로 버럭버럭 목청을 높이다 서로 홧김에 끊어버렸다.
때마침 그날은 결혼식을 앞두고 인사차 여자네 집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한차례 전화선 타고 목청전쟁을 치른지라 저녁쯤 만난 두 사람은 어색하기만 하였다.
예비 처가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여자가 먼저 입을 떼었다.
조수석에 앉아 정면을 주시한 채 퉁명스럽게.
“사람이 왜 그래?”
“뭐가?”
“좀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파운데이션 중간색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야 하는 거야?”
“도대체 내가 답답해서 할 말이 없다. 색깔이름이 중간색이 뭐냐구?”
“알았어. 그만해! 다 관둬. 필요 없다구!”
격앙된 음성으로 다시 접전이 벌어지려는 순간 자동차는 여자의 집 앞에 도착하고 있었다.
어른들 앞에서 내색은 할 수 없고, 중간색으로 인한 다툼은 잠시 휴전국면에 들어갔다.
그랬던 그 남자와 살고 또 살아가다 이제는 지난 추억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가끔 꺼내며 웃는다.
옹고집 피우는 일을 대하거나, 고지식한 일면이라도 드러나면 나는 가차 없이 중간색사건 떠올려 상기시키며 그를 째려본다.
짊어지고 온 함 속에 문제의 파운데이션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그 중간색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던 그 남자와 결혼하지 말 것을 했었다.
복장 터져 어찌 살지 캄캄했으니까.
자신머리로 이해하지 못한 사실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남자.
그가 변했다.
마누라 심부름도 곧잘 한다.
중간색 파운데이션뿐만 아니라 생리대도 사 올 정도로 바뀌었다.
뾰족한 그도 세월의 넓이만큼 뭉툭해진 거다.
분명한 자기색만 강조하더니 물 흐르듯 살면서 이색, 저색 다 섞였다.
남편 자체가 중간색이 되었을 줄이야.
깨소금 맛이다 놀리며 웃다보니 지난 일들이 새롭다.
아침식탁에서 딸아이의 융통성 없음을 책망하는 남편 보다가, 갑자기 중간색 사건이 떠올랐다.
부전여전임을 모르는가.
딸에게 아빠의 중간색 사건을 놀리듯 얘기해주니 웃느라 밥을 못 먹는다.
듣다보니 중간색이라는 이름이 꽤 괜찮다.
개성 없어 보이긴 하나, 이도 저도 다 포용하고 가는 인생길만 같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중간색 파운데이션으로 얼굴을 덧칠하고 산다.
중간쯤의 사람노릇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매일이기에.
2010년 8월 16일
잊을 수 없는 중간색사건(?) 떠올리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