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땀
“유뽕어머니! 예쁜 이름 하나만 지어주세요!”
“네에? 갑자기 무슨 이름을 말씀하시는 건데요?”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누군가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해 왔다.
“어머나! 제가 어떻게 이름을 지을 수 있겠어요.”
“글 좀 쓰시잖아요. 그런 일쯤 쉬울 거 같아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상대가 내미는 ‘글 좀....’이라는 표현에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다섯 살 아들의 감각치료실 밖에 앉아 수첩에 낙서 일삼으니 뭐라도 되는가 싶었겠지.
이름 좀 지어달라며 다가온 이는 장애인복지관 내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였다.
당시 여성 지체장애인 모임에서 비즈공예를 하고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기업 측에서 콘도건물 1층 상가에 판매점을 제공한 모양이다.
그곳의 상호를 지어달라는 얘기다.
단순한 내 머리에서 큰 의미가 함축된 상호가 나올 리 없다.
쉽고 편한 맘으로 오래 고민하지 않고 정했다.
이름 하여 구슬땀!
뇌성마비나 사고로 지체장애가 된 여인들.
온몸이 뒤틀리며 한 톨 씩 실에 꿰어 엮는 비즈공예다.
작고 미세한 구슬을 집어 올리기 위해 흘린 땀의 무게와 숱한 날들이 모여 비로소 작품으로 완성된다.
가락지 하나가 탄생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싸워야 했을까.
한 땀, 한 땀 수놓듯 구슬위에 인내의 땀을 보탰을 생각에 나온 이름이다.
간단하게 이름풀이를 하여 건네주니, 담당사회복지사 얼굴이 오색 찬란 구슬 빛만큼이나 환해진다.
며칠 뒤, 관할 시장 비롯하여 공무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업식을 치르게 되었다.
초대장과 함께 작은 상자하나를 내민다.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당연히 참석자 명단에 끼게 되었단다.
낯선 자리에, 그것도 남자들만 득실거릴 상황이 짐작되어 거절을 했다.
행사에 불참하고 선물꾸러미를 풀어보니 조금은 촌스럽다 여겨질 목걸이가 들어있다.
아마도 모조진주쯤 될 성 싶다.
거울 속엔 우유 빛깔 진주목걸이가 목 짧은 여자의 앞섶에서 곱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차마 목에 걸고 다닐 수가 없었다.
값싼 모조품에 불과할지라도 아픔으로 뭉쳐졌을 땀방울 농축 무게를 알기에 그러했다.
칠이라도 벗겨질까, 줄이라도 끊어질까 경대서랍에 간직한 채 몇 년 세월 바라보기만 하였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 아들과 드라이브삼아 떠났던 그 길에서 구슬땀을 보기도 했다.
우연히 들어선 건물 일층입구 간판을 보자 가슴 중앙에 쿵! 소리가 난다.
직접 보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번쩍이는 아크릴도 아니고 형광색 네온사인도 아닌 헝겊 현수막에 인쇄된 구슬땀.
자세하게 설명했던 글자의 위치와 색상까지 맘에 쏙 들었다.
‘구슬’은 가로로 나란히, ‘땀’ 글자는 강조하여 줄 바꿔 다음 칸에 써 달라 했었다.
네모박스까지 색줄로 쳐서 말이다.
혼자만 아는 양, 멀찌감치 서서 한참을 은밀하게 바라보다 오곤 했다.
여름휴가 겸 아이들 방학을 맞아 시어머니와 시누이 내외가 왔다.
나보다 열 살 손아래 시누이는 남편의 막내 동생이다.
옥구슬 은구슬 아이들 셋이나 거느리고 오라버니 집을 방문한 것이다.
시댁식구 곱기만 한 것이 아니기에 온다는 소식 듣고 몇 주일 전부터 속이 불편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분가하기 전 한 공간에 살면서 쌓인 앙금이 꽤 많았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더니 서운한 기억만 잔뜩 각인이 되어있던 차였다.
이사한집 구경삼아 들리겠다며 낳은 지 석 달 되어가는 고물고물 늦둥이도 데리고 왔다.
찌는 폭염에 지쳐가던 나는 어질어질 현기증과 메스꺼움 동시에 느껴가며 이미 더위를 배불리 먹은 뒤였다. 하여 시댁일행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하얀 대문 안으로 “언니!”라며 들어서는 시누이 얼굴이 땀에 절어있다.
먼 거리 오느라 차안에서 어지간히 고생한 안색이다.
거실에 온갖 선물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우리가족들 새 옷이 분배되듯 제 주인을 찾아간다.
진짜 중요한 덩어리가 이제 나오는 모양이다.
시누이남편이 허리가 휘는 거짓 엄살로 끙끙거리며 커다란 박스를 가져온다.
오래전부터 침만 질질 흘리고 갖고 싶어도 눈요기만으로 끝냈던 고급냄비세트다.
언니를 위해 준비했다며, 정작 자기는 한 개만 있고 선물이라서 구색 갖춰 준비한 거란다.
불앞에서 요리하느라 몸에서 흘릴 수 있는 국물은 죄다 쏟아내고 있는 판에 선물이고 뭐고 솔직히 첨엔 다 귀찮았다.
머리와 얼굴이 땀범벅이 되어 흘러내리다 턱밑에 구슬로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한손으로 훔쳐내며 냄비구경을 한다.
좋네! 어머나 내가 갖고 싶었던 건데! 필요이상 감동하며 시누이 얼굴을 보니 입이 귀에 걸렸다. 가식 아닌 진심이 느껴졌다.
전혀 연결되지 않는 그림인데, 왜 그 순간 경대서랍에 묵혀둔 진주목걸이가 오버랩 되었을까. 불가사의한 일이다.
모유 먹이느라 젖가슴 부풀어있고 아이 세 번이나 품고 내밀었으니 뱃살 모양도 내 것과 흡사하다.
장애로 뒤틀리든 어미로 피고름 짜든 고통은 같은 무게의 땀방울이었을 거라는 묘한 동질감이 교차되어왔다.
대롱대롱 새끼들 매달고 바다구경 시켜주겠다 땀 흘리며 달려왔다.
내가 흘린 땀만 값지다 모질다 퉁퉁거리느라 발견하지 못했던 또 한 곳의 여인이 제 몸 진액 짜내어 구슬을 만들고 있었다.
값비싼 고급냄비세트에 흐물거리며 옛 감정이 삽시간에 녹아버린 걸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흘러버린 세월 탓도 있겠고, 살집만큼이나 늘어난 묵은 정도 한 몫 하였으리라.
이박삼일 좁은 공간에서 비비적대고 한솥밥 먹다보니 어느새 서울 가는 날이다.
살구엑기스와 장아찌 한줌, 텃밭 푸성귀 담아 보퉁이를 챙겨줬다.
올케표시는 하고 싶었다.
시누이도 나도 이제 또 다시 각자의 위치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땀을 흘릴 것이다.
진정한 구슬의 가치를 알기에.
아침부터 물기 굶주렸던 하늘을 쥐어짜며 비가 쏟아진다.
시인의 아내 집 지붕 붉은 기왓골 따라 동그랗게 물 구슬들이 모였다가 땅 아래로 곤두박질을 친다.
일주일 내내 턱밑에 포도송이로 맺혔던 땀방울은 선선함에 흔적도 없다.
폭염더위 잘 참았노라 하늘이 선물한 바람목걸이 덕분이다.
구슬땀!
빛바랜 현수막간판이나마 그곳에 아직도 있을까.
2010년 8월 2일
여름나들이 왔던 시누이 떠나보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