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봉 동지(同志)들
그들이 뭉쳤다.
같은 성씨를 가진 한 통속이라고 몰아붙이곤 했는데, 이참에 나는 확실한 외톨이가 되었다.
동해의 절경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에 족적 남겼다는 이유로 세 사람은 더욱 질기게 서로를 끌어안는다.
지금으로부터 삼년 전 칠월이었던가.
겨우 아홉 살이던 사내아이가 아비의 손을 잡고 가파른 설악산 대청봉에 오른 적이 있다.
사람들의 말보다 자연의 숨소리를 먼저 익힌 아이.
돌 틈 흐르는 샘물에 입맛 다시고, 몇 백 년 하늘로 뻗은 노송의 살결을 쓰다듬던 아이.
사람의 마을에선 장애아로 이름 붙여져 특별대우를 받으나 산속에서만큼은 훨훨 자유롭다.
발끝에 차여 구르는 돌마저 벗이 되는 오솔길.
물오른 나무마다 내뿜는 초록입김에 비로소 막힌 숨을 내 쉴 줄도 안다.
산에서 자유로운 아이다.
산에만 가면 눈이 빛나 온갖 풀잎이며 나뭇가지를 흔들어 댄다.
도시에서 가르치고 배워도 끝내 제자리걸음이던 친구사귀는 법을 산에선 제 스스로 익힌다.
남한에서 한라산, 지리산 다음으로 높다는 설악산 대청봉을 어미보다 먼저 밟았다.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휴대전화 화면으로 전송받았을 때, 숨 막히는 전율과 함께 참았던 울음 터뜨리고 말았다.
거친 산길 잘 참고 오른 아들인데, 틈만 나면 네가 짐이다 끙끙거린 어미였다 생각하니 내내 눈물만 쏟아졌다.
한 여름 뙤약볕에 평지를 걷는 일에도 헉헉거리기 마련인데, 험한 산길 어찌 올랐을까.
가끔 아들과의 일상에서 바위에 짓눌리듯 가슴이 답답해지면, 대청봉 올라 손가락 브이 만들며 웃던 사진 속 녀석의 얼굴을 떠올린다.
아들과 걷는 길, 힘이 되어주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번 여름엔 열다섯 살 딸아이가 대청봉 등반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교회 학생부에서 단체로 가는 캠프 일정이었지만, 얼굴엔 내키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다.
평소 산책코스 야산을 걷는 일도 힘겨워하던 아이였다.
가족이 걷는 산행 중에도 맨 뒤로 따라 걸으며 꼭대기에 이르도록 징징거리기 일쑤였다.
이것이 무슨 휴일이냐고, 휴일은 집에서 늘어지게 쉬는 게 진정한 휴일 아니냐고 울음 속에 어버버버 섞여 흘린다.
앞서 걷던 나와 남편은 낯빛 붉게 핏대 세우며 울어대는 딸을 쳐다보며 웃기만 하였다.
지친 딸을 위로하겠다며 바위중간에 걸터앉히고 겨우 내민 것이 떡갈나무 잎 왕관이다.
아이는 순진하여 눈물 콧물 범벅이다가도 잎사귀 여러 겹 포개 만든 아버지 손길 왕관을 눌러쓰고 해맑은 눈으로 껌뻑거렸다.
숨 고른 후, 다시 걷자하면 또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이다.
점점 나이 먹어 사춘기로 접어들자 엉덩짝이 볼록하고 다리도 늘씬한 것이 숙녀 티가 제법 난다.
세월아 네월아 급할 것 없이 태연자약 걷는 걸음걸이를 보며, 오리궁둥짝 무거워 그러느냐며 놀려대곤 했다.
그랬던 딸아이가 대청봉엘 가게 되었으니 기함 할 만한 일 아닌가.
중청대피소에서 일박 한다고 말하니, 동네 소풍이라 여기는지 별걸 다 배낭 속에 챙기려 한다. 갈아입을 옷, 심지어는 클렌징로션까지 집어 든다.
최소한의 짐만 지고 가야한다며 가차 없이 빼 버렸다. 전투상황인데 옷 갈아입고 얼굴 세안하고 있을 것이냐며 하루 극기 훈련 삼아 다녀오라 했다.
다음날.
남편도 대청봉으로 출발했다.
딸이 내려오는 길로 부녀상봉이라도 하는 양 올라간다.
남편의 학급 남자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대청봉 등반에 나서게 된 거다.
이거야 원. 무슨 대청봉 퍼레이드도 아니고 동네 뒷산 오르듯 하니 약이 오른다.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하나 남겨주고 싶다며 자기 반 아이들과 방학 전 약속을 했단다.
버글버글 시커먼 사내아이들 이끌고 청정지역 설악산 계곡마다 굵직한 변성기 목소리로 가득했을 상상에 피식 미소가 그려진다.
쉽지 않았을 일인데 진정한 스승의 모습 보여준 남편이 조금(!) 존경스럽다.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한 딸은 파김치 꼴이다.
땀에 절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대충 올려 묶은 채, 살아있었냐는 나의 농담에 와락 안긴다.
하산하다 아빠를 만났다며 악전고투 끝에 살아남은 전우 이야기 하듯 나불거린다.
무사히(?) 산 아래 제 둥지를 찾아온 딸아이가 기특하여 자꾸 쓰다듬었다.
내 자식들은 둘 다 용감무쌍한 정의의 용사다. 여리고 비실비실한 엄마 보다 백배 낫다.
밤 아홉시가 다 되어 새벽에 떠났던 남편이 무사귀환을 하였다.
무박으로 다녀온 탓에 몰골은 거의 패잔병 수준이다.
학급전체 아이들에게 냉면과 수육까지 사주고 왔다는 사실에 바가지만 박박 긁었다.
카드명세서 찍힌 금액을 보니 목소리가 더욱 앙칼지게 나온다.
선생이 되어 애들 밥 한번 못 사주냐고 말한다. 하여간 요즘 보기 드문 제자사랑이다.
얼마나 피곤했던 걸까.
밤새 코 골아대는 통에 전투상황이 재현되는 현장감 느끼며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각종 대포와 기관총소리를 사람의 콧구멍에서 다양하게 발포하니 그러했다.
새벽녘이던가.
부스스 잠이 깬 듯 뭔 소리가 들리기에 희미한 눈을 뜨니 남편이 앓는 소리 내며 엉거주춤 서있다.
뻗정다리로 구부정하게 허리 굽히고 아이가 되어 투덜댄다.
바지가 올라가지 않는다며 고무줄 헐렁한데도 혼자 올리지 못한 채, 절절매고 있다.
좀 지나니 딸아이도 엉금엉금 제 방에서 기어 나오는데 표정이 울상이다.
알 밴 다리와 배낭무게 견뎌낸 허리까지 쑤신다며 말 보다 신음이 앞선다.
주일인지라 점심때가 훨씬 지나 교회에서 돌아와 보니, 부녀는 부자연스런 걸음걸이로 어기적거린다.
혹여 뭐라고 놀리기라도 하면, 언제부터 그들 부녀가 한 편이었던가 이중창으로 쏜다.
가봤느냐 대청봉!
이 고통을 엄마가, 당신이 알기나 해!
성씨 같은 세 인간이 어찌나 대청봉 동지로 뭉쳐 총 공격을 해오는지 가관이다.
아! 기어코 설악산 대청봉에 225미리 내 신발짝이라도 얹어놓고 와야 하리.
설움의 날이 깊어지기 전에,
동지애 드높이는 전씨 세 마리(?)의 꼴불견 보기 싫어서라도, 까짓 너를 베개삼고 말리라.
게 있거라. 대청봉!
2010년 7월 25일
남편과 딸 대청봉 다녀온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