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울
기리울 밭은 멀고 험하다.
빽빽한 소나무 숲을 한참이나 걸어야 한다. 사람하나 겨우 빠져나갈 좁다란 오솔길을 홀로 걷노라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청설모 한 마리가 솔가지를 건너뛰느라 하늘 쪽에서 겅중거릴 때도 오싹 소름이 끼치곤 한다.
새참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기리울에 간다. 밭 갈러 가신 할아버지 드릴 참이다.
행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최대한 눈을 내리깔고 땅바닥만 보며 걷는다. 머리 위 똬리에 올라앉아 한 소반 차려질 새참이 쏟아지면 낭패니까.
마지막 남은코스 언덕아래 개울가에 도착했다. 넓적한 징검다리 조심스레 밟고 낮게 흐르는 물위를 걷는다.
폴짝 끝 발을 떼니 봄의 꼭대기 날아가던 종달새가 까르르 웃음 여러 쪽 보내온다.
대견하게 잘 넘었다는 노랫말로 들렸다.
저만치 할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오가는 우리 집 누렁이암소가 보인다. 나만큼 나이를 먹었다는데, 그럼 저 녀석도 열 살이겠네.
집에 두고 온 늦둥이 송아지 생각이 나는가보다. 자꾸 운다.
망 물린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헉헉댄다. 젖이 불어서 그런가.
밭고랑 갈다가 풀 뜯는 일에 한눈팔지 말라며 채워놓은 망이 갑갑한지 고개를 휘젓기도 한다.
잠방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할아버지 종아리엔 벌써 흙자국이 선명하다.
“할아버지! 이거 잡수시고 하세유!”
“거기 놔둬라!”
몇 줄 남지 않았으니 마저 하겠다는 음성이다.
따끈히 끓인 동태찌개와 장아찌, 멸치볶음...., 그리고 또 뭐였더라?
잡풀이나 흙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잘 늘어놓는다.
분명 점심을 거하게 먹고 왔건만 군침이 돈다. 먼 산길 고개 넘는 사이 배가 푹 꺼지고 말았나보다.
스텐주발 뚜껑을 열어본다. 꽤 많이 담긴 양인데 설마 조금은 남기시겠지.
풀 섶을 헤치며 할아버지가 오신다.
오래된 해소기침 한 무더기 끌어올려 밭둑에 가래 뱉고, 사락사락 풀잎 소리만 먼저 걷는다.
“이거 잡숫고 계세유. 연화아저씨 밭에 가서 물 떠 올게유!”
집에서 들고 온 양은 주전자를 흔들며 한 고개 넘어 샘물가로 간다.
사시사철 물이 달던 샘이 당숙네 밭에 가면 있다.
온종일 밭을 달군 봄 햇살이 샛노란 주전자 몸뚱이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달랑거리는 금덩이에 맑은 샘물 퍼 담고 할아버지 새참 광주리 곁으로 왔다.
면도 하지 않은 할아버지수염에 밥알 한 알이 떨어질듯 붙어 오물오물 박자를 맞춘다.
웃으면 안 되는데....., 별것이 다 재밌던 열 살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 곳을 송림(松林)이라고도 했다.
소나무가 많은 산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기리울’이라는 이름이 더 좋다. 어쩐지 정감 있고 ‘길이 울창하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동네 아이들이 기리울 나들이를 결정한 것은, 새참 심부름 겸 현장답사 끝낸 나의 발표가 있은 후였다.
밥해먹고 놀기엔 기똥차게 안성맞춤인 곳이라 과대광고를 외쳐댔다.
각자 가져올 그릇이나 양념과 반찬 정하는 일엔 역시 대장격인 옆집 승주가 한 몫을 한다.
내게 떨어진 준비물은 쌀과 솥단지다.
모든 것은 할머니 몰래 철저하게 빼내야 한다. 호랑이 울 할머니에게 들키는 날이면, 매질은 당연지사요 덤으로 거친 욕을 되돌이표 붙여 만날 듣게 된다.
날짜가 정해지고 호시탐탐 할머니 나가는 순간만 노리고 있었다.
장삼득씨 구멍가게로 화투치러 가는 시간을 이용하면 된다.
바지랑대 세워 버틴 빨랫줄 위 옷들이 바람결에 바싹 말라가던 어느 봄날 오후.
삐거덕 사립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마침내 할머니가 마실 가셨다.
대청마루 구석에 있는 쌀뒤주를 열고 한 됫박 푸짐하게 양은솥에 퍼 담는다.
은밀한 곳을 알아냈다. 뒤란 담장 아래 숨겼다가 밤중에 미리 정해진 공동장소(?)로 옮길 거다.
한 밤에 거사가 행해지고 있었다. 대문을 빠져나온 나와 동생들. 망을 보는 사이 골목길에서 담을 넘어 쌀 담긴 솥단지를 무사히 안고 나왔다.
떼거리 아이들의 한 끼 식량이 오롯이 나에게 달려있다는 막중한 사명감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아이들이 떼 지어 간다.
점찍어 놓은 그 장소 기리울로 맘도 들뜨고 걸음도 날아갈듯 뛰어간다.
당숙네 샘물가에 진을 쳤다. 벌써 땀에 끈적이는 낯을 씻는 녀석도 있다.
돌 몇 개 세우고 솥을 걸어놓으니 근사한 아궁이다.
땔감을 주워오는 녀석, 쌀을 씻어 안치는 계집아이 저마다 제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해 놓는다.
아! 진짜 밥맛이 꿀맛이다. 고추장 한 숟가락에 썩썩 비벼도, 묵은 짠지에 올려 먹어도 끝내주는 요리다.
볼록해진 배 두드리며 퍼질러 앉아있는데, 누군가 밭둑에 불을 지른다.
죄다 모여들어 낄낄거리다 억새풀에 붙은 불길이었는지 어느 계집아이 앞머리를 홀라당 태워버렸다. 손바닥에 물을 축여 열심히 발랐으나 이마가 훤해져 대머리된걸 고쳐놓진 못했다.
해가 저물고 있다.
아침에 나섰던 둥지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는 거다.
정신 빠져 놀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제 솥단지며 갖가지 그릇들을 어떻게 집안으로 들인단 말인가.
기리울을 빠져나오는 오솔길의 길이가 그 날만큼 하염없이 멀고 길게 느껴진 적은 또 없으리.
길이 울창해서만 기리울이 아니었다. 길이 울음 날 만큼 길고 길어서 ‘기리울’인가보다. 집에 가기 싫다.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어둑해진 마을로 들어섰다.
스파이를 심어놓지도 않았고, 방송국 기자가 다녀간 적도 없었다.
헌데 울 할머니 벌써 기리울 사건을 다 알고 골목 앞에 나와 있다.
뒤춤에 감춘 뽕나무 막대기는 길기도 하여라.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게 다 보인다.
그날 밤.
퉁퉁 부은 눈과 매 맞은 다리를 쓰다듬다 훌쩍이며 잠이 들었다.
놀러간 건 잘못이 아닌데, 몰래 훔쳐간 건 용서 못한다는 할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눈물 훔치다 빠져들던 스르르 잠결에도 기리울 오솔길이 보였다.
샘물에 지은 밥을 고추장에 비벼 할머니 먼저 드릴 걸.
정말 맛있었다고 펑펑 매 맞아 울먹이면서도 그 말은 할 걸 그랬다.
꿀꺽!
2010년 5월 19일
기리울 샘물가로 나들이 가고 싶은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