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분의 영미님께.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감히 영미님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번 글 중 세 사람의 ‘영미들’을 향해 감탄사 연발하며 써놓았는데,
아뿔싸! 나중에 알았습니다. 당신을 빼놓다니요.
하여 대전시 어디쯤에 살고 계실 또 한분 나의 영미님께 편지를 올립니다.
기억하시나요?
평소 인터넷 어떤 글에도 댓글 달지 않는다 하셨죠. 처음 제 글에 댓글을 달았다며 수줍게 다가오신 영미님.
아득한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본명이 ‘영미’였음을 알게 된 것도 책 보내드리며 주소 여쭙다가 그리 되었지요.
인품이나 문학적 지식이거나 제대로 배우고 갖추지 못한 저에게 필명까지 선물해 주셨습니다.
아시죠? ‘예천(藝泉)’이라는 그 이름을 제가 얼마나 아끼는지요. 예술적인 감각이 샘처럼 솟아나는 글을 쓰라는 뜻이었던가요?
이름값 하겠노라 꼴값을 떨어보는데, 여전히 저는 함량미달인 인생입니다.
영미님!
저 이사했어요.
손바닥만한 마당이 있습니다. 네모난 텃밭도 만들었지요. 꼭 그만큼 하늘과 바람이 드나드는 촌스러운 집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제 글을 읽으신다면, 집자랑 늘어지게 써놓은 것도 이미 보셨겠네요.
오래 전, 자신감 잃고 쩔쩔매던 촌 아낙에게 힘 불끈 용기 주신 저만의 영미님께 집 소개를 드릴까합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저의 식솔(?)들이라 하면 이해하시려나.
담장을 따라 과일나무 서너 그루가 있어요.
중앙에 탐스럽게 봄소식 알려오던 살구나무가 분홍빛 꽃을 피웠습니다. 꽃만 쳐다봐도 배부를 만큼 탐스럽기만 하였습니다.
이상 저온현상 탓에 날아든 벌떼들이 꿀도 양껏 빨아먹지 못하고 떨어져 죽어갔지만, 제법 많은 살구 알을 달아놓았더군요. 이따금씩 바람이 불면 콩알만 한 살구열매가 안쓰럽게 바닥을 뒹굴곤 합니다.
살구나무에서 대여섯 걸음 걸어가면 왼쪽에 배나무가 있답니다. 배턴을 이어 받듯 살구꽃 지기 무섭게 배꽃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이조년의 시조가락이 절로 흥얼거려지는 풍경이지요.
기회 놓칠세라 같이 사는 남자가 사진에 담고, 자신의 호와 낙관까지 찍어놓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잘 그린 수묵화 한 폭 같지요?
들여다볼수록 내 집 마당에 핀 꽃이 기특하고, 사진 잘 찍는 그 남자가 대견합니다.
영미님!
처음 뵙던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재잘재잘 수다스런 아낙입니다.
몸 나이만 먹어가고 영혼의 철없음은 멈춤 상태랍니다.
잔디밭을 기어가는 개미떼와 온종일 떠들기도 하고, 너풀너풀 흔들리는 빨랫줄에 기대어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답니다. 보는 이가 좀 한심하다 여기겠지만, 저는 이런 자신이 싫지 않습니다.
나물인가, 화초인가 가늠할 수 없게 작은 매발톱꽃 싹이 올라오던 때도 그랬습니다.
하필 이름이 무슨 발톱꽃이냐고 숨넘어가게 까르륵 웃어대던 마당엔 사진기를 든 낯익은 남자가 어이없게 쳐다볼 뿐이었지요.
어때요? 빛깔도 모양도 여간 앙증맞은 게 아닙니다.
시멘트벽돌 회색담벼락의 차가운 느낌을 한방에 날려 버릴 튤립 한 쌍입니다.
양양오일장날 두포기를 사면서 색깔 선택으로 옥신각신 끝에 우리 집 식구가 된 꽃이지요.
어째 심을 당시는 곧게 서있더니, 시간이 갈수록 감정상한 표정으로 서로 고개 돌리고 있네요. 티격태격 잘하는 주인부부를 닮았나봅니다.
저의 속내까지 전부 다 읽으셨던 영미님!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가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기억하시나요?
첫 번째 항목이 빨랫줄이었고, 두 번째가 장독대였습니다.
드디어 소원성취 했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거나한 꿈을 걸어둘걸 그랬습니다. 작고 소박한 걸 바라니 금세 이뤄지더군요.
이른 아침 동네 수탉이 목청을 가다듬자마자, 저는 벌떡 일어납니다.
햇살이 부서져라 마당 안으로 들어오면, 채 떨어지지 않은 잠 부스러기들을 이불에 싸안고 밖으로 나오지요.
허공에 몇 번 이불깃발을 펄럭이다 난간마다 쫙 펼쳐 널어놓습니다.
살구나무와 토끼장 앞 감나무 몸통을 이어 빨랫줄을 걸었어요.
일렬종대 빨랫감이 걸립니다.
해질녘이면 낡은 이불에도, 오래 입던 빨래들에도 이제껏 담지 못했던 바람과 햇볕의 단내가 행복하게 묻어납니다.
참, 텃밭에 부추와 열무, 고추 등등 온갖 먹을거리들이 넘쳐납니다.
잠깐사이 부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분에 넘치게 누리고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미님!
아직도 변함없이 저를 지켜보고 계시다면....,
잘 살아냈다고,
잘 견뎌왔다고,
잘 가고 있노라고 당신 특유의 웃음으로 칭찬해 주세요.
또 한분 나의 영미님이 아릿한 그리움으로 남는 봄밤입니다.
당신......,
영 육간 강건하시겠지요?
2010년 5월 12일
봄바람 불어 휘청거리던 날에.
- 예천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