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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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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길 사람들 2 - 시인의 아내


BY 박예천 2010-04-22

 

              시인의 아내



정해진 주차공간이 따로 없는 곳이 공원길 사람들의 마을이다.

꼭 내 집 앞이 아니어도 좋다. 골목을 오가는 차와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만 세워두면 되는 것이다.

그날도 내 집 앞엔 이미 여러 대의 차들이 꼬리를 물고 주차되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옆집 담벼락 가까이 차를 붙여댄 후 내리려는데 대문기둥에 붙은 문패가 보인다. 오래 된 사각 나뭇결에 한문으로 새겨 넣은 이름 석 자. 남편이 말했던 그 시인의 함자이다.

일명 ‘설악의 시인’으로 꽤 알려진 시인 이ㅇㅇ 님 댁이 바로 우리 옆집이다.

이사 오고 몇 날이 지나서야 남편의 동료에게서 그곳이 시인 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환경운동가로 알려져 있으며, 토지문학관 관장으로도 계셨었다. 정지용문학상등 여러 상도 받으신 걸로 기억한다. 중,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많은 시를 남기셨다고 들었다.  

2001년에 시인은 이미 작고 하셨고, 현재 미망인 되는 부인만 홀로 살고 있다.

 


이삿짐 옮기기 전, 빈집에 와 텃밭 손질하는데 눈인사를 보내온다.

“요즘 젊은 사람들 편한 아파트 생활을 좋아할 텐데....,어떻게 여기로 올 생각을 했어요? 대단하네.”

서투른 호미질과 괭이질에 몰두중인 우리부부에게 넘치는 격려를 한다.

낮은 담장너머 그 집은 2층 건물의 빨간 기와집이다. 두 필지의 땅을 넓은 마당으로 삼고 있다. 네모반듯한 단층 우리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태가 위풍당당 예술적이기도 하다.

시인의 아내는 현직 초등학교교사이다. 올해 팔월이면 정년퇴임을 한단다.

“난, 퇴직하면 자식들 집에 몇 달씩 다녀오느라 집을 오래 비울거야. 우리 집 화단에 뭐든 맘대로 심고 사용해요!”

지난겨울 늘어진 마른포도넝쿨에 내심 침을 흘려오던 차, 그 말에 꿀꺽 입맛이 다셔진다. 손만 뻗으면 우리 집에서도 쉽게 닿곤 하던 과일나무였다.

오며가며 눈요기만 하던 옥토가 거저생긴 기분이 들었다. 허나 말은 그렇다 해도 선뜻 사용함이 도리는 아니지 싶다. 햇살 더 깊어지고 잎사귀 무성해지면 또 생각이 바뀌려나.


시인의 아내에게서는 언제나 후덕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풍긴다. 연륜의 깊이도 한 몫을 하겠지만 원래 타고난 성품이 아닌가 한다.

교사의 아내답지 못한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깊이가 있다.

한참이나 어른임에도 나를 대하노라면 깍듯하게 고개 숙여 먼저 인사한다.

“아휴, 사모님 아니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저를 사모님이라 부르시다니요...호호호”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 목소리 낮추는 내 꼴 스스로 보니, 속에서 킥킥 웃음이 사라지질 않는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빌려 입은 기분이다.

“선생님 부인이니 당연히 사모님이 맞지요!”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 거한 이름처럼 느껴져서요. 호호호”

하긴 나는 여태 누구의 아내로 있어지기보다, 억센(?)부인의 남편으로 그를 세워두었던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는 동네 아이들.

대부분 근처 남자 중학교 아이들 짓이다. 떼를 지어 벨을 누르곤 재빠르게 달아난다.

몇 번은 눈감아 주었으나 참을 수 없을 지경에 도달하자 그만 폭발하고 만다.

“야! 너희들 거기 서. 이놈의 새끼들 죽을 줄 알어! 전기감전장치라도 설치하고 말거다!”

만화영화 ‘달려라하니’의 홍두깨 부인 자세로 씩씩거렸다.

곁에 섰던 딸아이가 “엄마, 정말 무섭다!”한다. 솔직히 말이 좀 거칠긴 하다.

골목이 떠나가라 목에 핏대를 세우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시인의 아내가 바라본다.

아! 진짜 쪽팔린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게 맞지.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으며 고개 숙여 눈인사를 했다.

남편 얼굴에 먹칠 잔뜩 하고 만다. 선생의 아내이기보다 다혈질 동네아줌마이기를 자청한 셈이다.


 

봄밤이 깊어간다.

저녁설거지 끝낸 후, 음식물쓰레기통을 들고 놀이터 앞까지 걸어가는 중이다.

집집마다 쇠줄 매어놓은 개들이 슬리퍼 끄는 내발소리에 컹컹 짖는다.

“안녕, 얘야 나다! 좋은 집 지키느라 너도 고생이 많다!”  

누가 봤다면 정신 나간 여자로 여겼을 거다. 

혼자 걷는 것도 꽤나 운치 있는 일이군.

공원길 사람들의 창안에도 하루를 무사히 접은 얘깃거리, 웃음소리가 채워지겠지.

산책삼아 돌아 걷는 길.

저만치 높다란 시인의 집이 보인다. 그 옆에 팔짱끼듯 붙은 것이 내 집이다.

시인의 아내는 책을 읽고 있는가. 격자무늬 가득한 창호지문가에 불빛이 새어나온다.

남편의 빈자리 더듬으며 긴 밤 사색에라도 잠겼을까. 별생각을 다해본다.

음식물쓰레기 빈 통 그네 태우듯 손에 걸고 추적추적 북향집 할배 집을 지난다.

 


오늘의 결론!

나는 그냥 나로 살란다. 누구의 아내라는 것에 어쩐지 무게가 실리는 듯.

 



 


 

2010년 4월 22일

봄비 내리는 날...시인의 아내 옆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