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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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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영미


BY 박예천 2010-04-20

 

                오! 영미

 


4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었건만, 올 해는 아무소식이 없다.

해마다 꼭 이맘때면 나의 늘어진 일상에 일침을 놓는 친구.

“예천아! 목련이 피었더구나. 봤니? 너 여전히 글은 쓰고 있지?”

전화로든 메일이든, 어김없이 열일곱 교정 뜰 앞 춘설에 얼어가던 목련 잎을 떠올려주곤 했다. 

이미 영미 곁에선 뽀얀 꽃잎이 흔적도 없이 내려앉아 버린 걸까.

설거지하다 멀뚱히 바라본 옆집 꽃밭에 핀 목련이 내 벗 영미를 기억하게 한다.

 

어머니들 세대에 붙여진 흔한 이름 ‘영자, 순자’만큼이나 나와 인연 깊은‘영미들’도 평범하게 불리는 이름이다.

내 인생 스쳐갔을 수많은 영미들 중, 뇌리에 굵직하게 남은 몇 사람 소개할까 한다.


여고단짝 영미의 눈빛은 쥐눈이콩 마냥 새카맣다.

깨알 한바가지 쏟아내는 말투보다 먼저 깜빡이며 우수에 잠기는 눈빛이 고운 영미다.

엄살범벅 옹알이 푸념도, 숨넘어가게 껄떡거리는 나의 온갖 수다에도 척척 박자 맞추는 속 깊은 친구다.

얼굴본지 십년도 넘었다. 허나 전화 속 목소리만큼은 방금 헤어진 이웃집여자의 톤이다.

그녀도 나만큼 주름 깊어졌겠고 뱃살 출렁 고민 중일까 짐작만 해본다. 만날 하는 말이 사노라면 만나겠지 말꼭지에 달아놓는다. 과연 그날은 오기나 할지.

공유한 추억의 시점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나이테를 둘러쓴 지금.

사는 일에, 때로 인생 험산준령 넘는 신음에 걷고 달린다. 아니 나는 자주 넘어지기도 한다. 불쑥 나타나 지친 내 삶에 지렛대를 세워주곤 하는 영미다. 염치없이 들이대고 풀어 놓는 역할은 언제나 내 쪽이다.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에 나오는 벗이 바로 내 친구, 기호 1번 영미다. 봄이라서 그런가. 엄청나게 그립다.


연애시절 귀가 따갑게 들어온 이름 또한 ‘영미’다.

장장 오년을 사귀었다는 남편의 첫사랑이다. 활자로 나온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도 부족한 여인이라 했다.

외모에서 풍기는 청순함은 말할 것도 없음이요, 지닌 내면의 성품도 아리따움의 극치라 말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편의 첫사랑 영미를 향한 질투심이 솟구치곤 했다. 그녀는 남편고등학교 앨범 한 칸에서 단정히 웃고 있었다.

중년이 된 그녀가 열 살쯤 넘겼을 두 아들을 데리고 내가 사는 곳에 놀러 온 적이 있다. 자못 흥분되었다. 동창이라는 이름으로 바닷가에 사는 첫사랑을 만나러 온 여인 영미다.

아! 그 실망감이라니. 

팽팽하게 붙은 살집과 얼굴 곳곳에 피어있는 기미. 감추려는 시도였는지 색조화장이 지나치게 화려했다. 눈을 깜빡일 때 마다 굵은 아이라인이 속눈썹 속에서 숨바꼭질을 한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옹기항아리 깨지는 목소리로 우렁차게 내 쏘는 육두문자.

내 남편을 부르는데, 이름 끝마다 ‘놈’과 ‘새끼’는 기본으로 붙는다.

동행한 아들들이 장난기 심해지자 등을 거친 손바닥으로 후려갈기며 욕쟁이아줌마로 변신한다. 

“으이구 지겨워. 야 이 쌍년의 새끼들아! 제발 가만히 좀 못 있겠냐. 응?”

쌍년(?)의 새끼들은 정말 잠시도 앉아있는 법 없이 음식점 안을 뛰어다녔다. 수조 속에 손을 휘젓거나 활어들 향해 돌멩이도 던진다.

그녀 영미는, 첫사랑의 아내 앞에서 우아한 자태로 다가서지 못하고 팔자 드센 아낙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연방 내쉬는 한숨 속에 운명이 어떻고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말로 미안함을 대신한다.    

괜찮다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며 어색한 위로를 던지는 남편의 표정에서 씁쓸함을 읽었다. 이래서 첫사랑은 가슴속에 간직만 하는 것이 옳도다.

그날 이후, 남아있던 일말의 질투심은 자동으로 사라져버렸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서 알게 된 기호 3번 영미는 나보다 네 살이나 아래다.

살아온 삶의 무게는 억만 겹이나 두껍다. 힘에 겨운 그녀는 전화기 너머에서 언제나 꺼이꺼이 웃는다. 나는 안다. 버거운 날이면 오히려 호탕하게 너털웃음으로 울고 있다는 것을.

목련의 벗 영미와 같은 배려로, 나또한 그녀에게 버팀목이 되고 싶으나 늘 함량미달인 인격인지라 줄 게 없다. 수화기속에 말줄임표 몇 개 찍어댈 뿐이다.

신랑이 술만 먹으면 개차반이니 맘 편할 날 없고 허덕이며 산다. 그러나 자식에게만큼은 뼈와 살이 녹아나는 정을 쏟고 있다. 질긴 게 목숨이라고 할딱이며 버티지만, 살아야 할 이유가 자식이기도 하다. 아들로 살아지는 나의 삶처럼.

얼굴본적 없으나 목소리만큼은 언제나 힘이 넘친다. 여 전사, 혹은 인류혁명가 같은 에너지로 지구를 통째 집어던질 기세다.

궂은 날씨에도 분명 힘차게 자전거페달을 밟았을 거다. 눈물일랑은 바람결 나부끼는 벚꽃 잎에 슬쩍 묻혀 떨구겠지. 그게 내가 아는 그녀다. 


오늘 나의 영미들은 어떤 모습으로 또 하루를 살아냈을까.

한 결 같이 나를 스친 영미들은 강인하고 두루두루 싸안을 줄 알았으며 달관의 지혜도 겸비했다.  

영원히 아름다울 이름, ‘영미(永美)’라고 내 식으로 풀어본다.

그대들 부디 잘 살고 있으라!

봄날 핀 꽃들이 눈물겹게 아름다운 것은 혹한의 겨울을 이겨냈음이라더라.

사노라면............, 만나지겠지.


안녕 영미!

 


 


2010년 4월 20일

나의 영미들 생각에 잠겼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