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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에 가다


BY 박예천 2009-10-08

    

        배꼽에 가다

 


공부(?) 좀 한 후 골라보라며 복사물 한 묶음을 내민다.

맨 앞에 꼬불거리는 산맥과 하천이 표시된 지도까지 여러 장 붙어있다.

일박으로 떠날 작정이니 잘 검토 후 장소를 결정하라는 남편님의 배려이다.

기특한지고. 빼놓지 않고 봄가을마다 가족여행을 계획하다니.

주말 날씨가 고르지 못할 것이라는 일기예보도 있고 하니 등산은 취소다.

최종후보지로 남은 곳이 국토의 정중앙, 일명 우리나라의 배꼽이라 부르기도 하는 강원도 양구이다.

 

 


토요일아침 급하게 보따리를 챙겨 드디어 출발했다.

일박이일로 계획은 하였지만 비소식이 있어 당일 돌아올 수도 있었다.

딸아이 중간고사가 다음주초인데 부모가 되어서 시험 앞둔 아이를 데리고 놀러가다니.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을 경험하러간다고 안심시켰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법만 알아가느라 늘 지친 딸아이였다. 단 하루만이라도 가을향기 맘껏 들이마시게 하고 싶었다.

 



  

들판이 온통 황금색이다. 곳곳에 낟가리가 쌓여있거나 마른짚단이 세워진 모습도 보인다. 한참 타작중인 논에 콤바인이 돌아다니고 금방 베어 졌을 볏짚 냄새가 아련히 유년의 논밭을 떠오르게 한다.

무엇을 뿌렸든 때가 되면 거두게 되는 것. 산이나 들이나 제 열매 내밀고 가을을 말한다.

인생의 봄날 뿌린 씨앗이 무엇이었는지 가늠조차 힘든 내게 결실을 묻는 쪽빛하늘.

그저 부끄럽기만 하구나.

부실하게 먹은 아침 탓인지 배꼽시계가 꼬르륵거린다. 양구읍내에 차를 세우고 가족 넷이 먹을거리를 찾았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까르륵 웃어대는 딸아이. 훌쩍 커버린 키가 아빠만하다. 분식집에 들러 김밥과 라면으로 허기를 채웠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군복일색이다. 최전방이 가까우니 군부대가 많다. 더구나 주말이라 면회 온 연인 팔짱을 끼거나 어깨 감싸 안고 걷는 장병의 발걸음에 힘이 넘친다. 국방색 옷과 대조되는 여인의 화사한 옷차림. 얼마나 그립고 반가웠을까.

군대 간 용팔이 만나러 무작정 기차를 탔던 나의 이십대 떠올리며 남편 몰래 음흉하게 웃어본다.  

 


양구읍에서 가까운 거리에 박수근 미술관이 있었다.

자그마한 이층 석조건물이다. 담벼락에 붙어있는 담쟁이덩굴마다 단풍들어 색이 곱기만 하다. 

평소 미술에 조예가 없는 내게도 편안하게 다가오는 그림들이었다. 두 남자의 뒷모습이거나 빨래터의 일상을 유화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게 표현했다.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상에게서 예술적인 감각을 끌어낸 것이다.

글을 쓰는 일도 그렇지 않은가. 대단하고 거창하게 시작하려는 자세는 오히려 읽는 이들에게 부담감을 줄뿐이다.

되도록 나는, 친근하게 다가서면서도 잔잔한 감동까지 전해주는 글을 쓰고 싶다.

미술관의 규모는 아담했다. 다음에 또 들려보자는 말을 모으며 행선지를 옮겼다.

 


학창시절 수업시간에만 듣던 땅굴견학을 간다. 곁에 있는 을지전망대 까지 보고 올 작정이다.

제4땅굴 향해 민통선 안에까지 가려면 출입증을 받아야 한단다. 휴전선 근방에 까지 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섬뜩해졌다.

온 사방이 해발 1,000미터의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하나가 나온다. 6.25전쟁당시 유엔군이 화채그릇(punch bowl)을 닮았다고 해서 ‘펀치볼’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다. 동양최대의 운석이 떨어진 자리라고 남편이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데, 확인을 해보지 않아 정확도는 미지수다.

제4땅굴에 도착하여 안보영화 한편 감상하고 지하로 들어가 레일위에 설치된 관람차를 탔다.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한기가 몰려왔다. 남침을 위해 폭약까지 설치해가며 조금씩 굴을 파내려 왔겠지. 동굴특유의 음산함이 전해지며 낙숫물인듯 물방울이 떨어진다.

“이야! 선선하다. 여기다 김치보관하면 맛이 끝내주겠는걸!”

나란히 줄지어 동행하는 사람들 다 듣도록 남편이 우스개 소리를 한다. 안내하는 여자가 들었는지 깔깔 웃으며 아줌마들이 곧잘 하는 말인데 아저씨도 하시네요.

기념사진이 빠질 수 없다. 곳곳에 가을절정 드러내는 나무들마다 끌어안고 찍어봤다.

변함없는 모델수준에 사진기도 촬영기사(?)인 남편도 여간 꿀꿀한 표정이 아니다.

 


가까이에 위치한 ‘을지전망대’를 향해 간다.

북한이 훤히 보인다는 곳이다. 속초 가까운 곳에 통일전망대를 자주 다녀온 터라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아슬아슬 경사가 심하고 굽이져 있는 도로를 달린다. 잔뜩 흐린데다 안개까지 끼어 ‘전망대’라는 이름값을 못하게 한다. 올라가봤자 북한은커녕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으리라.   

그래도 왔으니 족적은 남겨야하리.

뽀얗게 피어오르는 안개가 가득하다. 딸아이는 구름 속을 헤맨다며 재잘거린다.

전쟁의 잔해, 아픔의 상징들 앞에 오직 아이들만 평화롭다.

길가에 이어져있는 철망마다 경계 표지판이 달려있다. 몇 미터 간격으로 ‘지뢰’라는 빨간 글씨체가 붙어있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영화에서나 봤을 장면들이 현실에 펼쳐져있다.

차를 세우고 지뢰표지판 바로 앞에 서있는 나무아래서 밤을 주웠다. 뭐하는 짓인지.

 


돌아오는 길.

작업이 끝난 고랭지 무밭에 버리고 간 채소가 보인다. 시골아낙 특유의 정신(?)이 발동하여 한 아름 짊어지고 내려왔다.

차안에 딸아이가 툴툴거린다. 깍두기 담가놓으면 아삭아삭 제일 잘 먹을 거면서 말이다.

다시 펀치 볼 마을 거쳐 돌아오려는데 포도의 단 냄새가 코끝을 들썩인다.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포도농장에 포장작업이 한창이다. 싼값에 포도와 즙을 덤까지 얹어 구입했다. 여행의 흔적들을 챙긴 것이다. 집에 돌아와 쟁여두고 먹을 생각에 포만감이 밀려온다.

 


양구읍내로 돌아온 저녁.

시골 식당에서 얼큰한 부대찌개를 시켰다. 콧등에 땀방울을 매달고 아이들이 잘도 먹는다.

허름한 여관에서 계획된 일박을 한다. 경비를 아끼려는 마음도 있었으나 편하기만 하면 여행의 묘미가 사라진다. 일부러 작은 방을 골라 넷이서 웅크리고 끌어안으며 자야 제 맛이다. 끈끈한 가족애도 넘치게 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여러 말이 오간다.

“아빠 코고는 소리 땜에 못 잤어. 갑자기 발을 배로 확 올려서 깜짝 놀랬어!”

잠 설쳤지만 할 얘기가 많은 딸이 남편 향해 눈을 흘긴다.

짐 싸고 여관을 나와 가벼운 아침 산책을 했다.

선사박물관 앞 호수에 길게 만들어 놓은 나무다리가 훌륭했다. 쿵쿵거리며 달리던 아이들이 아침이슬 수놓은 거미줄을 보며 질색한다. 세상에서 거미가 제일 무섭단다.

뱀은 주물럭거리며 장난치던 녀석들이 정말 별꼴이다 싶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마을들을 돌아다녔다. 시골 장터도 기웃거려보고 지나가던 강아지와도 말을 건넸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두근거린다. 더불어 함께한 일행이 내 소중한 가족이고 보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어차피 인생여정도 긴 여행이 아니던가. 이제 속초시 나의 집으로 가야지. 

 


조용하고 고즈넉한 여행이었다.

명소를 찾아 헤맸거나 넘치는 인파속에 고생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살던 곳을 빠져나와 옆 마을에 마실 온 기분이다.

강원도 땅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해외여행 욕심은 괜히 가져봤구나 싶다.

아직도 볼 것이 많고 갈 곳은 더욱 넘친다.

국토의 정중앙, 우리나라의 배꼽, 강원도 양구 땅에 다녀온 여행 후기를 이쯤에서 맺을까 한다.

 

다음엔 또 어딜 간다지?






2009년 9월 26일과 그 다음날

양구에 가족여행 다녀온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