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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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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먼 곳에


BY 박예천 2009-09-28

         님은 먼 곳에

 

 

“야! 어째 육년이 넘게 배웠는데 척척 반주를 못하냐?”

열네 살 먹은 딸아이에게 내미는 말이다.

중년의 어미는 나이마저 잊은 듯하다. 다시 쳐봐라, 제대로 빠르기를 지켜라 등등 요구사항이 늘어간다.

몇 번은 마지못해 건반을 눌러대더니 볼멘소리 던져놓고 차라리 엄마가 해보란다.

나라고 별 수 있나. 피아노 뚜껑 들쳐본지가 아득하기만 한 것을.


헌 책방에서 구입했다는 남편의 책을 올려놓고 한껏 분위기 잡아본다.

‘최신판 포크송 대백과’ 라는 책이다. 기타를 다시 잡아보겠다며 마련한 거다.

헌데 제목만 최신판이지 풍기는 곰팡내가 족히 이십년쯤 묵은 것으로 보인다.

누렇게 변색된 두툼한 지면에선 두께만큼이나 벗어난 긴 세월이 읽혀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 침 발라 책장을 넘기면서 “어머, 이것 봐. 이 곡!, 저 노래도 있네!” 흥분되었다.

대충 훑어가는데 영화의 삽입곡으로 흘러나왔던 노래하나가 가슴에 콕 박히고 만다.

그래서 딸아이를 졸라 피아노앞에 앉힌 것이다. 


왕년(?)의 가수 김추자가 불렀던 ‘님은 먼 곳에’라는 노래다.

최근 가창력 있는 젊은 가수들이 편곡하여 다른 분위기로 부르기도 한다.

들어보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노래다.

이상하게도 멜로디와 가사가 심오하게 들려온다. 내 이런 증상이 뭔지 도통 자가진단조차 되지 않는다.

지워지지 않는 님이라도 있다면야 애절하다 말하겠지만 그도 아니고 보면 가을 탓인가?

불쑥 가슴이 아려온다.

멍하니 하늘 바라보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눈을 감노라면 가슴이 뜨겁다.


피아노앞에 앉는다.

엉성한 실력으로 왼손 코드를 지켜가며 멜로디 눌러본다. 또 한 차례 먹먹해진다.

나는 무엇을 그립게 더듬고 있는가.

목소리에 강약 살려가며 딸아이 방에서 조심스럽게 노래를 흘린다.

천천히 불러내려가다가 ‘못산다 할 것을’ 이 부분쯤에서 뭔가 툭 정수리에 쏟아진다.

찌릿하기도 하고 간절하기까지 하다. 병이 깊어가는 걸까.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님’이라는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내게 있어 조국도 아니요, 나라의 절대자급 임금도 아니다. 그저 막연하게 이루지 못한 한 덩어리라고 풀고 싶다.

우선 세 가지로 나누어 볼까한다.

이 노래 부르며 내 속이 못내 들끓고 뜨거워지는 이유를 나름 둘러대 보자.


첫째, 노래 속에 떠올리게 되는 나의 님은 ‘그리운 사람들’이다.

오매불망 타오르던 첫사랑의 그이일수도 있고 유년시절 동무이거나 추억을  공유한 이들이다. 모두 어디쯤에서 둥지를 틀고 있을까, 뭘 하고 살까 그리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번호 매기며 장황하게 늘어놓으려니 꽤나 거창한 논법을 내미는가 싶겠지만 한낱 늙어가는 아낙의 푸념일 뿐이다.


두 번째 내 ‘님’을 변명하자면,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세월을 되짚고 싶어 안달이 난 심정이 바로 두 번째 ‘님’이다.

십년이나 이십년 거슬러 올라간다면 헛걸음 남기지 않았으리라 후회마저 섞어 님 향한 맘이 목젖을 울린다.

딱히 지금보다 나아질 상황의 삶도 아니겠지만 ‘만약’이라는 전제하에 몇 십 년 나이를 훌쩍 거꾸로 건너뛰어 보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님’을 소개한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꿈’이다.

망상으로만 끝나 결실 없는 현재이지만 참으로 여러 꿈을 꾸었었다. ‘이럴걸, 저렇게 해볼 걸...,’만 중얼대다 이루어 놓은 것 하나 없이 여기 서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늦지 않았다 위로를 한다지만 꿈이란 적절한 때가 있기 마련이다.

흔한 말로 ‘포기’라는 말은 배추를 세는 단위라고 우스개 소리 한다.

정말 아직 내게도 꿈을 꾸어볼 에너지가 남아 있을까.

 


 

 


반주와 노래를 동시에 하기란 역시 실력 없는 내겐 버거운 일이다. 막힘없이 흐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자꾸 노래가 끊어진다.

그것보라지. 여전히 나는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는 꼴이지 않는가.

저녁엔 딸아이 데리고 집 앞 찜질방 지하에 있는 노래방이라도 가야겠군.

 

 

그리운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지난 시절에 눈물을 주며, 꿈을 이루지 못해 꺽꺽 목울대가 서러운데 가을마저 깊다. 

그렇게 모두 멀어져 간다. 나의 님들이 먼 곳에만 있다.

못내 망설이기만 하다가 놓쳐버린 사랑했던 내 님들이 훨훨 날아간다.


아! 진짜 마지막으로 ‘님은 먼 곳에’ 멋들어지게 뽑아보고 정신 차리자.

점심 먹기 전에 딱 한번만 더!

나는 지금 피아노 치러 딸아이 방에 간다.

목청을 가다듬는 헛기침 크게 뱉어내고.

에-헤-헴!!!




2009년 9월 28일

‘님은 먼 곳에’ 한 곡에만 가을 내내 빠져있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