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648

별빛너머 가을은 오고


BY 박예천 2009-08-14

 

           별빛너머 가을은 오고

 


 


 

말복 땡볕 속이지만 가을빛이 스며있다.

아들을 태우고 나서는 오후의 거리가 반짝 거린다. 며칠 태풍이 모질게 훑고 지나갔을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폭우 뒤에 맞이하는 청명함인지라 더욱 개운하다.

살갗에 닿는 바람의 숨결을 느낀다. 이미 가을이 담벼락 틈새마다 꼭꼭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차창을 모두 열어젖히고 흠뻑 가을 새순바람을 들이마셔 본다.


열하루 꼬박 배앓이를 했다.

겉모양이 박색인 나는 내장들도 제 꼴이 아닌가보다. 걸핏하면 속이 아프다. 집안내력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원인모를 속병으로 십여 년 넘게 앓으셨다. 친정아버지 역시 늘 아랫배 쓸어내리며 인상 쓴 모습이 먼저 떠오를 정도이다.

하찮게 여기던 것들도 평소엔 잊고 살다가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울 때 가치를 알게 되는가보다. 잘 먹고 무리 없이 소화시키는 것도 감사한 일임을 이제야 절실히 깨닫는다.

아무것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더구나 곤욕스러웠던 것은 식욕도 생기지 않고 기운이 없음에도 꼬박꼬박 가족들 세끼 밥을 챙겨줘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가 먹자고 멀건 흰죽을 끓이는 날엔 서글픔이 밀려왔다.


겨우 점심으로 된밥을 먹게 된 오늘.

부실한 어미 덕에 결석까지 했던 아들 녀석 학원 두어군데 들렸다. 미술학원을 마치고 피아노학원문에 막 들어서려는데 딸아이가 전화를 했다.

“엄마, 아빠가 지금 빨리 오래! 양양 산에 나들이 가자구.”

“무슨 소리야? 엄만 배가 낫지도 않았고, 이제 피아노학원 도착했는데...., 참나.”

시간은 오후 다섯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혼자 구시렁거리다가 마지못해 아들을 챙겨 일어섰다. 가끔 철부지 같은 남편의 행동이지만 맞춰주어야 가정의 평화도 유지되는 것임을 안다.


집에 도착하니 나갈 채비를 마친 딸아이와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딸한테 얼마나 세뇌를 시킨 거야? 퇴근하자마자 잔소리 일색이더라!”

“뭘?”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나에게 남편의 대답이 이어진다.

“엄마한테 매시간 닭살 멘트를 보냈느냐, 배 아프다는데 죽도 끓여주지 못하느냐면서 아빠는 뭐하는 사람이냐구 난리두 아니었어. 당신이 조종한 거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딸과 한통속인 게 밉지 않다는 뜻이 숨어있다.


뒷말 없이 따라나섰다. 

자두 소쿠리 짊어지고 오던 그 산길에 버리고 온다 한들, 집이 아니라면 모든 시름도 잊을 듯 했다.

남편도 내심 구불구불 산길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삼십 여분 달려 온 곳이 엊그제 거기다.

빗속에 자두는 다 떨어지고 없었다. 떠밀듯 나를 길 중간에 내려놓고 마구 달려보란다.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심호흡을 했다.

골골하는 아내의 병이 시멘트벽속에서는 호전의 기미가 보일 것 같지 않았던 걸까.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린다. 분명 꾀병은 아니었건만 신기하게도 통증이 사라졌다.

설익은 밤송이라도 떨어뜨리려는 울림인가 남편이 외친다.

“좋아! 저녁은 뚜거리탕으로 내가 쏜다. 죽 못 끓여준 벌로 사주는 거다!”

 


<도라지꽃을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산속에서 해가 저물었다.

심지도 가꾸지도 않았는데 도라지꽃이 별처럼 피어있다. 솔잎사이 풀 섶을 지나다가 드문드문 피어있는 보랏빛 별을 바라보았다. 꽃잎 들여다보니 흰 별이 숨어있다.

밤하늘이 열리기전에 숲이 먼저 별을 띄웠다. 밤 별들이 보낸 전령들로만 여겨졌다. 오늘밤엔 별무더기가 억수로 쏟아질 것이라는 예보.

양양 남대천 앞 식당에서 뚜거리탕과 은어튀김 한 접시로 허기진 저녁을 채웠다. 거금 삼만 몇 천원을 썼다는 둥 또 배 아프면 당장 갖다 버린다며 남편은 호탕하게 소리친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으슥한 산길로 접어드니 낯익은 동네 설악동이다.

찌르르 풀벌레 우는 논길쯤에 내렸다. 인적도 뜸한 도로 위에 넷이서 질펀히 드러눕고 앉았다. 아들은 벌레소리가 무서운지 자꾸 귀를 막는다.

딸아이가 나를 향해 재잘거린다.

“엄마! 별이다. 저거 봐, 엄청 많어. 그거 왜 띠 두른 거 뭐지? 아..., 토성 보고 싶다!”

금방이라도 손 내밀면 잡힐 듯 하늘에 잔뜩 별꽃이 피었다.

남편과 딸아이는 북두칠성이라도 낚아채려는지 하늘을 휘젓고 있다. 알고 있는 별자리 이름이 전부 동원되고 있다.

계절 엇갈리는 길목 위에 드리워진 저녁하늘이 온통 별빛천장이다.

별 테두리마다 가을이끼가 부옇게 끼어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니 숲에 피었던 보라 색 별이기도 하다.

어디에고 눈을 돌리면 별은 있었다. 하늘의 별만 반짝이는 게 아니었다.


열하루 배앓이 탓에 내 별들이 나를 반짝이게 한다.

별빛너머 저렇게 가을은 오고 마는데.....,

이젠 정말 아프지 말아야지.







2009년 8월 13일

가족이 별이 되어 다가온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