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는 자두향기
언제나 그러하듯 우리가족 나들이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따로 준비할 것도 없이 불쑥 나서기 때문이기도 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남편이 아이들과 내게 외친다.
“나가자!”
이 말 한마디면 족하다.
어디 가느냐, 뭘 챙겨가야 하느냐 묻지 않는다. 주섬주섬 여벌 옷 한 가지만 보퉁이에 담았다. 혹시 모르니 수건은 있어야겠다.
물만 보면 뛰어드는 아들 녀석을 위한 특별배려이다.
아니나 다를까.
양양장날이고 하니 장터에나 가보자는 말을 알아듣고 칭얼대기 시작한다.
“아니, 물에 가자 양양 물!”
물에도 격이 있다. 수려한 산세와 더불어 물 맑기로 소문난 양양이 아니던가.
녀석도 이미 일급수에 적잖이 몸 던져본지라 과연 물의 기운을 아는 거다.
그리하여 붙인 이름, 양양 물.
아들의 소원도 성취시켜주고 딸아이와 발 담금질도 토닥토닥 해보겠다는 일석이조 야무진 생각 끝에 물가로 갔다.
이상저온 기후 탓에 피서객들로 붐벼야 할 곳들이 휭 하기만 하다.
도착한 곳이 하필이면 한우축사와 근접한 곳이었나 보다. 시도 때도 없이 혼성 듀엣이었다가 솔로로 외치는 소리. 음매!
아들 녀석이 가장 공포심을 갖는 대상이다. 영아기적 소로 인한 충격 때문에 울음소리만 들려도 질색을 한다.
몇 초 간격으로 목청 뽑아대는 한우님(?)들 덕분에 사색이 된 아들을 양양 물에서 금방 건져야 했다.
돌아오는 길.
정해진 도로와는 비껴선 곳에 낯선 길이 보인다.
무작정 진입을 시도해본다. 익숙해진 길이나 산에서는 기대할 것도 기다려주는 것도 만나기 힘들다.
자연의 감정이입은 늘 예상치 못한 길목이거나 상황에서 벌어진다.
구불구불 산길을 한참이나 들어섰다.
잔돌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비포장 산길이다. 까마득한 산 정상까지 길게 이어졌다. 마주치는 차 한 대없는 첩첩산중을 걷다시피 차가 움직여간다.
양옆으로 보이는 것은 온통 초록뿐이다.
입구에서부터 갈참나무 잎사귀가 펄럭이며 대환영을 하더니 곧이어 다래 덩굴이 댕글댕글 가득한 열매 매달고 연두 빛 종을 흔든다.
지금껏 짧은 인생이나마 꾸리면서 이토록 대단한 갈채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키 높이 자란 오동나무도 하늘과 맞닿을 듯 내려다보며 꽃송이 가득 내민다.
먹을거리가 널려있다. 봄이면 고사리도 취나물도 그득하리라. 입안에 침이 고이기도 전에 배가 부르다.
“앗! 저게 뭐지?”
차창 열어젖힌 채 탄성을 지르며 달리던 남편이 갑자기 소리친다.
해괴망측한 물건이거나 뱀이 똬리를 틀고 있으려니 했다.
“왜 그래? 뭔데?”
“자두야. 재래종이지. 어릴 때 집 앞에 달려있던 바로 그게 여기 있네!”
‘어릴 때’라는 말을 내뱉으며 달려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바로 어린아이였다.
폴짝폴짝 뛰며 좋아라한다. 저렇게 말이 많던 사람이었는지 의구심이 갈 정도로 혼자 마구 떠든다.
오백 원짜리 동전크기만할까. 작은 색유리구슬같은 자두가 산속에서 탱글탱글 익어 땅바닥을 뒹군다.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니 단내가 물씬 풍겨 나온다. 시장에서 보던 자두와 빛깔도 크기도 다르다. 저 혼자 크는 야생자두인 셈이다.
나무 밑에 농익어 떨어진 자두를 주워 담았다. 남편과 딸아이는 입에 챙겨 넣기가 바쁘다.
맛있다, 꿀맛이다 쉴 새 없이 산 앞에서 감탄사 연발이다.
여름 산이 꿀 송이 열매를 매달아 놓았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말고 먹을 만큼만 얻어오자 했지만 역시 꾸러미가 과하다.
<산이 건네준 자두 무더기가 큰 소쿠리에 가득하다...급하게 찍어본 사진이다>
다시 산길을 간다.
자두냄새 가득 싣고 초록틈새로 난 황톳길을 달린다. 솔잎 향 섞인 갖가지 풀 내가 코끝에 감미로움을 선사한다.
소중히 아껴먹고 다시 씨앗을 심자했다. 어쩌면 자두나무도 피붙이 자식을 떼어놓는 심정이 자손만대 퍼지기 바랄 것이라 둘러대면서 말이다.
내 아이들에게 이야기 담긴 산길과 나뭇결마다, 야생초마다 스며있을 향기는 전해주고 싶은데 맘뿐이고 만다.
곳곳에 파헤쳐있는 공사 중 푯말.
현대식 숙박시설이거나 무슨 대기업연수원유치를 위해 안간힘 쓰는 양반들 생각의 길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 걸까.
입마다 게거품을 물고 ‘개발! 개발!’을 내뱉는데 진정 그들이 시도하는 개발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선거를 위한 정치성 냄새가 농후함도 익히 알고 있으나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강원도 평창 골프장 내에 빌라분양 건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빌라 한 채가 이십억이니 삼십억이 넘는다느니 숨넘어갈 듯 억억거린다. 턱없이 벌려놓은 사업은 부도위기에 치닫고 하루 감당해야 할 이자만 일억이라니.
고스란히 부채는 강원도민의 세금에서 충당되어진다는 결론이고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눈을 바로 떠보자. 당장 눈앞에 이익에만 급급함이 마땅한가.
지금의 내 세대로 세상이 끝이라면 모를까 대대손손 물려받은 자연을 후손에겐 남겨줘야 하지 않을까.
꼭 최신식, 최첨단, 최우선 등등 말 앞대가리에 ‘최’자를 붙여가며 당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벌이고 있으니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제발, 강원도 산들 좀 까뭉개고 으깨지 말았으면 한다.
산맥의 숨통 끊고 구멍 뚫어, 고속도로내고 터널 숭숭 만들어 놓고 있으니 개발하려다 개 발가락 꼴 될까 두렵다.
표현이 좀 과격해지려는 낌새가 느껴져 이만 접는다.
<딸아이와 남편이 따온 자두를 골라담고 닦아두는 모습이다^^>
어찌 되었든 오늘의 결론은 여름산열매 자두이다.
시장에서 보는 주먹만 한 크기는 개량종이요, 기막힌 여름 산의 농축된 맛은 우리 집 냉장고에 꼭꼭 숨어있다.
다음주말에 시댁에 들고 갈 작정이다. 모여 앉은 가족들의 이야기가 넘칠 것이다.
먹을거리의 이름은 음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함께 했던 사람들의 기억까지 솔솔 끌어내 올 것이다.
벌써부터 남편은 통통 튀며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우리 아부지 이거 디게 좋아하시는데.......히!”
누가 효자 아니랄까봐 입이 하마 꼴로 벌어졌다.
2009년 8월9일
이름 모를 산길에서 재래종 자두 보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