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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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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현(弄絃) - 열두 현에 사랑 싣고(10)


BY 박예천 2009-08-08

            

            농현(弄絃)

 

 

     -열두 현에 사랑 싣고 (10)-


 

 

 

<내 동생 석이>


마릿골 사는 내 동생 석이가 누이 집에 왔다.    

불혹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장가못간 노총각이다.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오랜 시간 운전하여 바다 곁으로 놀러왔다.

중년을 향해가는 나만큼 석이의 얼굴에도 주름이 깊어만 간다. 녀석의 골 깊은 주름사이에 유년시절 누이와 보낸 추억의 잔 때가 가득하다.

 


바쁜 농번기철 논과 밭으로 일 나가신 빈 집에는 삼남매뿐이었다.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에 우리끼리 둘러앉아 점심을 챙겨먹었다.

샛노란 계란찜 가운데 놓고 서로 더 퍼먹겠다고 안달이 나곤 했다. 훌쩍이는 녀석은 언제나 막내다. 어쩔 수 없다. 약자의 설움이려니 포기할 수밖에.

특별한 장난감이나 놀이도구가 없던 시절. 지천에 널린 것이 삼남매의 호기심거리였다.

어머니는 기다란 빨랫줄에 옥양목 홑이불을 널어두고 가셨다. 낮게 날아다니는 잠자리 떼 따라 바람결에 하얀 깃발이 나풀대고 있다. 바지랑대 출발점으로 삼고 삼남매는 때 절은 손도장 찍어대며 헝겊사이를 돌아다녔다. 풀 먹여 빳빳하게 다듬이질까지 마쳤건만 어머니의 회초리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담장 앞에서나 뒤란에서도 닥치는 대로 주워들고 소꿉놀이를 했다. 맘 착한 석이는 누이 말을 곧잘 들었다. 아무 역할이든 시키면 흉내 내어 따라했다.

 

 


“누나! 요즘은 저거 안 뜯나봐?”

“뭘? 어.....가야금? 그러네 정말 오래두 쉬고 있다 그치?”

집안에 온갖 먼지 끌어 앉고 멀뚱히 서있는 가야금이 눈에 거슬렸나보다.

남의 얘기하듯 둘러대고 보니 내 스스로도 한심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니, 뭐 줄도 늘어지고 음도 맞질 않아서 선생님 댁에 가야 되거든.”

핑계라고 둘러대 놓은 말이 요즘말로 저렴하기 그지없다.

고무줄처럼 늘어진 가야금을 눕혀놓으니 참으로 어색하기만 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너뿐인가 하노라 주절거리며 갖은 폼을 다 잡았는데 말이다.

흔히 아는 아리랑을 뜯어도, 노들강변을 울려 봐도 음색이 고르지 못하다.

작곡을 전공한 석이녀석이 곱게 듣고 있을 리 만무하다.

“아휴! 이게 뭐야. 줄마다 서 너 음이 높은데, 어떻게 연주를 하냐? 독주라면 모를까 협연이라도 하려면 영 아니네.”

실실 웃으며 딸아이 방 피아노 뚜껑을 연다. 방바닥에 앉은 나는 내친김에 열두 줄을 풀어 놓았다. 안족 꾸러미를 빼놓고 내 동생 석이가 조율해주는 대로 한 음씩 교정을 하는 중이다.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는 석이 이마와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송 맺힌다. 

한참이 흘렀을까. ‘이제 됐다’라는 말과 함께 석이가 손등으로 이마를 훑어댄다.

이럴 수가. 한결 부드럽게 음이 흘러간다. 손끝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지는 가락을 느낀다. 역시 대견한 내 동생 석이!

누이가 되었어도 제대로 도움을 준 적이 없다. 오히려 수족같이 부려먹었음에도 불평 한마디 없는 진국의 사나이다.

 


갓 스무 살을 넘겼을 때이던가. 녀석의 굴절된 아픔을 기억한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 해보겠다고 방학동안 집과 가까운 거리 이불공장에서 일했다.

아찔한 순간이었을 거다. 거대한 기계에 석이의 오른손이 빨려 들어갔다. 읍내 병원에서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서울특별시 병원으로 가는 길까지 부모님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어머니는 지금도 끔찍한 그 날을 떠올리며 눈물 그렁거린다. 도저히 회생불가능하다며 오른 손목을 절단해야만 한다는 의사의 말이다. 아버지는 오열했다. 병실 복도에 주저앉으며 당신이 죄 많아 벌을 받는 것이라 하였다.

의사를 찾아가 머리 조아리며 애원하셨다지. 제 구실 못해도 좋으니 붙여만 달라고. 손 모양만 남겨 달라 말했다는 거다. 거듭되는 피부이식 수술이 행해지고 뼈까지 으스러진 손 겨우 치료하기를 얼마였을까.

직접 소독해주며 으스러진 아들의 손 바라보다 차마 곁에서 숨죽여 울지도 못했다는 어머니.

재활치료를 마치고 한동안 석이의 표정은 어두웠다. 흰 장갑이 늘 오른손에 끼워져 있었다.

익숙해진 오른손 대신 왼손을 사용해야하는 번거로움에 진땀 흘리곤 하였다.

약한 모습 보일 수 없어 누이인 나도 녀석 앞에서는 일부러 명랑하기로 했었다. 

 


나폴레옹 아저씨의 말이던가. 과연 불가능은 없었다.

물건을 잡는 일에도 힘없이 떨어뜨리곤 하더니 점점 오른손이 움직였다.

나는 아직도 기적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전화기 너머로 석이 친구녀석이 알려주던 피아노 연주소리를.

“누나, 이 소리 들리세요? 이거 석이가 치는 거예요!”

“정말이니? 정말 석이가 치는 게 맞어?”

목이 메어 나오지 않는 내 목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았다. 대청마루에 앉아있던 모든 가족들이 흐느껴 눈물짓던 여름밤이었다.

다시 손이 움직여지기까지 고통의 날들을 어찌 견뎌 냈을까.

지금은 경기도 어느 도시에서 대규모 피아노 학원 원장님이 된 석이다.  

 

 


내 동생 석이 자랑하려니 점점 팔불출 누이가 되어간다.

야무지고 제 이익 잘 꾸리는 막내와 다르게 석이는 물컹하다. 정에 더 끌리고 착하기만 해서 이래저래 손해 보는 일이 많다.

막내 동생만큼만 되어보라고 자라면서 가족들에게 꾸지람도 호되게 들었다.

 

나는 내 동생 석이가 막내보다 좋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똑똑한 나무는 목재 감으로 베어져 도시로 나가고 구불구불 못생긴 나무인 석이가 마릿골을 지킨다.

치매 할머니 산책도 두루두루 시켜드리고 부모님 잘 섬기는 못난 나무로 산다.

석이 덕분에 마릿골 박가네는 숲이 우거져간다.

생전 웃을 일 없더니 석이가 물러터진 맘으로 웃겨드린다.

이런 말 맞는지 모르겠는데 나닮은 것 같아 석이가 좋다.

 

 


여름휴가마친 석이가 마릿골로 돌아간 다음날부터 다시 가야금을 끌어안고 있다.

살이 짓무르게 피눈물 흘려가며 재활에 성공한 녀석의 삶을 떠올리는 중이다.

더불어 귓가에 맴도는 아버지의 절규. 제발 손목에 붙여만 주시오!

장가 못 갔어도, 돈 많이 없어도 내 동생 석이가 최고다.

 

 


누이는 지금 가야금 열두 현 사랑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

이제 열 번째다. 두 고개 남았다.

입추도 지났으니 가을 숨을 들이마시고 어깨 좀 펴 볼까나.

여전히 숨차다. 네 덕분에 열 번째 얘기를 끝낸다.

고맙다 석아!




2009년 8월 8일

내 동생 석이가 생각나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