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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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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 자살사건


BY 박예천 2009-07-02

 

           자살사건

 

 


“엄마! 우리 옆 반 애가 오늘 죽었대.”

설거지 하느라 틀어놓은 수돗물 소리 때문에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딸아이에게 되물으니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뭐라고? 아니, 왜? 자살 맞니?”

놀라움에 커진 내목소리가 거실까지 울렸다.

인생의 쓴맛을 다 경험한 나이도 아니고 이제 막 피어오르는 시절이건만.


손바닥만한 도시에서, 잊을만하면 들리는 것이 자살소식이다.

중앙뉴스에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불과 작년에도 가슴 내려앉는 내용을 접했었다.

우울증이 심한 삼십대 여인의 죽음.

자신의 주거지도 아닌 고층아파트에 올라가 휴대전화로 남편을 불렀다는 것.

어디 어느 아파트 주차장으로 와라. 몇 층 복도 창에 내가 보이지 않느냐. 나 죽는 것 잘 봐라.

그렇게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원수 같은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심정으로 어린 자식들을 두고 죽었다.

눈앞에서 아내의 죽음을 목격한 남편이 실신하며 정신을 놓았다는 얘기다.

죽어서도 욕먹은 여자다. 모질다, 자식도 모르는 어미라는 등등 그녀에게 붙은 못된 수식어가 사건 이후에도 한참을 사람들 입과 입으로 돌아다녔다.


전직대통령의 자살사건 접하고도 그랬지만, 그런 일을 접하면 나는 오래도록 멍해진다.

뚜렷하게 비판의식이 생기는 것도 아니요, 방관자가 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넋이 나간다.

묘한 기운에 감지되어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동지애를 느껴 깊은 슬픔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니다. 뭔가 현실세계가 아닌 신비의 공간을 걷고 있는 기분이 된다. 아무것도 할 수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마치 남의 삶을 잠시 빌려 누리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지독한 허무의 늪으로 빠지는 것이다.

꼼짝할 수 없는 날이 계속된다.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으며 입에 들어오는 음식의 맛도 모르게 된다. 무덤덤한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제자리 찾기를 시도한다.

죽은 대상에 유독 애착을 느껴서도 아니건만, 감각기관이 먼저 반응을 하는 것이다.


이제 열네 살 먹은 소녀가 죽었다.

딸아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며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이다.

건물 옥상에 올라가 놀이터 쪽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죽은 아이를 두고 뒷이야기가 분분하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죽었다는 말도 있다.

입학당시 전교 일등이었고 중간고사 성적이 네 번째로 밀려났다는 것. 아버지는 떨어진 성적을 용납하지 못했고 이번 기말고사의 심적 부담이 커져 자살을 감행했다는 이야기.

동생을 사이에 두고 편애를 했다고도 말한다. 말다툼 끝에 아버지가 ‘너 그러면 차라리 나가 죽어라!’ 라고 했다는 뒷말도 있다.

사실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다만 채 피어나지도 못한 여린 꽃봉오리가 떨어져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어느 누구의 생명인들 소중하지 않은 게 있으랴. 이름 모를 풀포기에도 의미가 있다 했는데 과연 그 아이는 제 의미나 알고 간 것인지.

더구나 내 딸아이와 같은 나이라는 것이 내내 가슴 저미게 한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 자살이 만연하게 되었는지.

이미 각 지면을 통해 여러 의식 있는 분들이 소신 있게 의견을 피력했겠지만, 여전히 작금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소녀의 영정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는 아이들과 담임선생님.

친구들이 놓고 간 국화꽃 무더기를 화난 표정으로 밀쳐 버렸다는 그 아버지.

자식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빚어진 일순간 태도일까.

진정 그 아버지의 가치기준 속에 딸의 삶은 어떤 의미였는지 묻고 싶다.

 

어젯밤 남편이 쓴웃음 지으며 말한다.

“우리 아파트는 일층이라 다행이지?”

또다시 머릿속이 뒤죽박죽 복잡해진다. 생각의 꼬리들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한동안 질척한 늪 속에 빠져 들것만 같다.


 

 



2009년 7월 2일

딸아이 친구의 자살소식 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