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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욱국


BY 박예천 2009-06-10

 

            아욱국



 

그리움을 향한 뜰 안으로 두레박하나 내려 본다. 기다렸다는 듯 소박한 음식하나가 매달려 나온다.

나이를 먹을수록 유년의 일상들이 더욱 또렷해져가기만 한다. 기억의 샘은 마르지도 않는다. 사시사철 가뭄 없이 오히려 봇물이 된다.

진귀한 것도 아닌 어찌 보면 지긋지긋했을 먹을거리에 지독하게 구미가 당기는 요즘이다.

그것은 단순한 식욕이기보다 음식과 함께 했을 사람 그리운 병이다.


아! 보고픈 사람들.

두리반에 모여 앉아 나누었던 밥 한 끼. 가난이 듬성듬성 양념으로 섞이던 음식들 생각에 목구멍이 오그라들도록 군침이 돈다.

아욱국도 그중 하나였다.

아파트입구 한 구석에서 손바닥 만하게 펼쳐놓은 난전을 지키는 백발의 노인들이 보인다. 비닐 포대위에 옹색하게 버티고 앉은 아욱 무더기 가리키며 값을 물으니 천원이란다.

며칠 전부터 꿈속을 오락가락하는 할머니 생각에 덥석 집어 들었다.

냇가에서 잡아온 다슬기된장국에 꼭 넣어야할 푸성귀이기도 하다.


한줄기씩 껍질을 벗겨낸다.

흙 때 낀 할머니 손톱은 뭉툭했다. 닳고 닳아 네 번째 손톱은 아예 빠지고 없었지. 굳은살이 손톱대신 딱딱하게 올라앉아 있었다. 곁눈질로 할머니 네 번째 손가락을 내려다보니 소름이 끼쳐왔다. 검푸른 점하나가 손톱 있던 자리에 박혀있다. 감각 없이 휘두르는 손 가락틈새에서 언뜻 배어나오는 통증은 내 가슴께를 울려왔었다.

“할머니, 거기 이제는 안 아퍼?”

“아무렇지도 않다. 얼마나 오래 된 건데 아프겠냐.”

돌짝밭 일궈내던 호미질 끝, 땅속에 흘렸을 저린 손톱이다.  


품앗이 간 어머니 대신 할머니가 아욱줄기 껍질을 벗겨내었다.

한여름 폭염이 제 힘을 다하고 풀이 죽던 어느 한 날이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가 가을초입임을 알려주기도 했다.

쪼그리고 곁에 앉은 손녀에게 아욱국의 진미를 미리 귀띔해 주신다.

“이거 정말 맛있을 거여. 너 그 말 아냐? 가을 아욱국은 사위 올까봐 문 걸어두고 먹는다고 했단다.”

기똥차게 맛이 좋아 마누라도 내쫓고 먹는다는 것이다.

솥단지에 쌀뜨물 붓고 씻어 건져놓은 아욱을 넣는다. 된장 풀고 끝인가 싶었는데 아욱을 빡빡 주물러댄다.

도도하게 초록 깃을 세우던 아욱 잎이 된장기운에 눌려 풀이 죽는다.

“가을 아욱이 억세단다. 이렇게 해야 부드러워지고 된장 맛이 스며들지.”

불도 지피지 않은 부뚜막 앞에서 예닐곱이나 되었을 손녀딸이 벌써 마른침을 삼킨다.


마릿골 박가네 구들장에 누워있는 할머니가 어찌 속초 먼 땅 사는 손녀의 입맛을 알아차리셨을까.

벌써 여러 날 꿈속에 나타나 날마다 밥상을 차린다.

정갈하게 차려진 할머니 손길의 음식상 마주했으면서도 아침에 눈을 뜨면 가슴이 아려온다. 꿈이 잘 들어맞는 기이한 내 상황을 알기에 진즉에 통곡하고 마는 것이다.

할아버지 가시기 전에도 그랬다. 꿈속마다 찾아오셔서 잔치벌이고 집을 단장했었다.

엊그제 할머니는 온 동네 아낙들을 다 초대한다. 안방, 사랑방 모든 방마다 교자상 들이고 음식을 나른다.   

자꾸만 나보고 한복을 입으라며 내민다. 그것도 당신이 아끼던 옥색 여름 한복을.

손사래 치며 투정부렸다. 촌스럽다 노인 것을 왜 입느냐며 징징거렸다.

그럼 네 것을 입어라하신다. 색동한복 꺼내 입고 꽃신을 챙겨 신으려는데 또 아니란다. 당신 백고무신을 신으란다. 짚수세미로 잘 닦아 깨끗하다며 꼭 신어야한단다. 거부하느라 엉엉 울다 잠에서 깨어났다.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로 꿈 얘기 하는데 또 목이 잠겨온다.

“곧 가시려나보네. 아흔 한 살 되셨으니 사실만큼 사신 거다. 낼 모레 할머니 생신 아니냐. 올 때 속옷이나 사 오거라. 마지막 입을 것은 딸이나 손녀딸이 사오면 좋단다.”

치매할머니 수발하느라 어머니가 지친 걸까. 모질게만 들려오는 섭섭한 목소리에 괜한 소리로 윽박지르고 말았다.

사실 만큼이라는 게 얼마의 세월인지.

편한 날 한번 없었고, 좋은 것 잡수신 적 없는 것도 살 만큼의 날 속에 들어갈까.  

둘째고모 나만 보면 그랬지.

할머니 피고름 짜내어 느히 삼남매 키웠느니라.

맞다. 농군 같던 어머니대신 끌끌하게 먹이고 입히느라 허리 펼 날 없었다.


두어 시간 달인 다슬기 아욱국이 끓는다. 옹기그릇에 담아내니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흐물흐물 아욱에 감칠맛이 돈다.

꽁꽁 문 걸어두고 나 혼자 먹는다. 가을아욱도 아닌 것을 그립던 할머니와 고향집까지 내던지고 아욱국을 먹는다.

멀고 먼 길 할머니 혼자 가시라 하고 욕심의 색동저고리 껴입은 나 혼자 목이 메도록 퍼 먹는다.

아욱국 맛이 참 달큼하기도 하구나.





2009년 6월 10일.

아욱국 끓여주던 할머니 그리운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