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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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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이야기4 - 제비꽃


BY 박예천 2009-05-12

 

         제비꽃


 


<보랏빛 약속>



마릿골 장씨네 가게 담벼락 밑에 앉은뱅이 꽃이 피었다.

뒷골목 따라 길게 이어진 마른 풀길에도 군데군데 보랏빛 무더기가 보인다.

한나절 내내 꾸벅이며 졸다 남은 봄기운이 꽃으로 내려앉았다.

웅크리고 앉은 작은 키에 꽃잎마저 부끄러운지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사금파리 조각이나 병뚜껑을 모아다 소꿉놀이를 했었지.

사랑채문간 앞 고운 흙을 박박 긁어내어 밥을 짓고, 모래알로 떡도 빚어놓았다. 새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어머니의 화단에서 이름 모를 화초 잎 뎅겅 잘라와 무침반찬을 했다.

신랑각시놀이였는데 나의 낭군 역할이 마릿골 뉘 집 아들이었는지 떠오르질 않는다.

“와! 반지꽃이다”

녀석의 외침이 들리는가 싶더니 냉큼 달려간 곳이 장삼득씨네 옆 담벼락이었지.

보랏빛 무더기 속에서 길게 고개 내민 꽃대 잡아 뽑더니 한쪽 꽃잎 귀를 손톱으로 잘근 잘라낸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동그랗게 말아 구멍 난 꽃 귀 속으로 줄기를 밀어 넣는다.

금세 화려한 반지하나가 생겼다. 혹여 빠질세라 조심스레 끼워주던 꽃반지다.

손가락 고리 걸고 하는 약속만으로는 믿을 수 없어 증표하나 남겨 주었나보다.

보랏빛 약속이다.

강남 갔던 제비가 오던 시기에 피어난다 하여 ‘제비꽃’이라 이름 붙였다지.

오랑캐꽃, 제비꽃, 앉은뱅이 꽃으로 불리는 이름 중에도, ‘반지꽃’이라 했던 내 유년의 소꿉놀이 속 꽃 이름이 제일 좋다.

반지 걸어주던 녀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살고 있으려나.

 

 

 



<꿈은 노랗게 피고>



일곱 살이 되던 해에 기차역전 마을에 있는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시골예배당 앞뜰이 유치원마당이 되었고, 목사님부인이 선생님이다.

자주색 원복 차려입고 옆으로 기다랗게 늘어뜨린 노란색 가방을 메고 다녔다.

어른손바닥만한 가방 속에 수첩하나와 연필이 들어있었을까.

때마다 주는 간식을 먹지 않고 챙겨왔다. 가방이 불룩하도록 쟁여들고 달음박질쳤다. 사립문을 열자마자 집에서 기다릴 사내동생 두 녀석의 이름을 불러댔다. 눈이 빠져라 누이의 노란가방을 기다렸겠지.

시골유치원 제 1회 졸업생이 되던 순간까지 나의 꿈은 노란가방 속에서 키가 자랐다.

받아쓰기 백점짜리 시험지이거나 도화지 한 장에 정성껏 그려 넣은 그림이 접혀 노란가방으로 간다.

꿈이 깃들며 노랗게 피어난다.

여자대통령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멋진 화가도 되어본다.

무엇이든 꿈꾸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사실 무엇이고 될 수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들이 꿈에 불과했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얀 순수>



이제 나는 다시 돌아가고픈 자리를 꿈꾼다.

보랏빛 약속도 이룰 수 없었고, 노란 꿈조차 사라져버린 빈 들녘에서 순수를 되찾고자 하는 욕심으로 꿈틀댄다.

최초의 색으로 시작하고 싶은 거다.

이미 만신창이 되어버린 영혼과 세월 거스를 수 없는 육신이 전부인 꼴이지만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쳐본다.

헹궈 낼 수만 있다면 제대로 씻겨 원초적인 백색으로 태어나면 좋겠다.

스치는 인간들이 말한다.

나잇값 못하는 주제에 어떠어떠하다고 말이다.

대체 연령에 따라 발전해야 하는 감성의 도표가 있기라도 하는 것인지. 있다면 누구 기준에 맞춰 만들어 졌을라나.

늙어 죽을 때까지라도 노을이 곱다 말하며, 꽃잎 떨어지는 무게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순수로 살아 갈 거다. 

하얀 순수로 돌아가 나만의 색으로 채우겠다는 얘기다.

살아갈 궁리, 자식걱정만으로 남은 생을 덧입히기엔 어쩐지 억울하다.


앙증맞은 제비꽃 늘어놓고 괜히 심오한 척 유난을 떨었나보다.

결론은 내 멋대로 살겠다는 얘기다.




2009년 5월 11일에

제비꽃 추억을 퍼 올리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