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
점심시간이 되어 한 무리의 아이들이 학교운동장 구석 허술한 개구멍을 빠져 나와 근처 야산으로 간다. 소나무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는 도시락 맛은 소풍 길 들뜬 기분이 된다. 나무 밑 둥을 찾아 엉덩이를 걸치고 앉기도 하고 그냥 잡풀무더기에 털썩 다리를 뻗으며 먹는 밥맛이란 그 자리에 있어본 사람만 알 수 있다. 반찬이라고 해봤자 장아찌나 김치가 전부였고 어쩌다 멸치볶음 싸온 녀석은 숱한 젓가락 침범에 수난을 당해야 했다.
도시락으로 배가 부르면 초여름 햇살과 솔 향 가득한 산언덕으로 부는 바람에 졸음 한 무더기가 마구 쏟아진다. 이쯤 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서둘러 자리를 털고 가야하는 곳이 있다. 머리카락과 목 줄기에는 흐르는 땀의 짠 내가 가득하다.
근처 개울가에서 먹은 도시락을 씻는다. 말라붙은 밥풀이 떨어지지 않자 어떤 녀석은 모래한줌을 넣고 벅벅 문지르기도 한다. 말끔히 씻긴 금빛 양은도시락이 여름 하늘 가장 중간에서 내리쬐는 햇볕과 쨍하고 눈싸움하며 빛을 반사한다.
우리 행동대원들이 한입으로 모아 결정 내린 장소는 승화네 뽕밭이다. 그 집 오디가 알이 굵고 나무마다 달린 양도 많아 탐을 내며 때를 기다린다. 운이 좋게 승화할아버지가 뽕밭 순시를 나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살금살금 밭고랑을 밟는 순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소리가 손바닥만 한 뽕잎깃발들을 뒤흔든다.
“이놈들, 썩 나가지 못 하겠냐 엉? 다시 또 오면 다리를 분질러 버릴 거다.”
그까짓 오디 좀 따 가면 어떠냐고 줄행랑을 치는 순간에도 종알거리며 한참을 뛰는 척 하지만 사실은 일보 후퇴일 뿐이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적당한 때를 보아서 재진입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승화할아버지가 숱 많은 양 눈썹을 실룩이며 목에 핏대 세울 만도 하다. 오디를 따다보면 뽕밭이랑사이 심은 콩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짓밟게 되어 콩이 열매를 맺기도 전에 망가지게 생겼으니 누구인들 고함을 치지 않겠는가.
야트막한 산의 절반은 족히 될 그 집 뽕밭을 한눈으로만 감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잠시 다른 둔덕으로 넘어가는 승화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숨어서 확인한 우리들은 재차 뽕밭으로 투입되는 작전을 실행한다.
일찌감치 씻어둔 도시락에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오디를 따서 채우느라 재잘거림 없이 조용하다. 숨소리를 크게 내면 사라졌던 할아버지 다시 올까 누구 한 놈 입을 열지 않고 뽕잎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린다.
어지간히 도시락 미리 채운 녀석은 오디를 제 입으로 훔쳐 넣느라 바쁘고 준비성 철저한 아이는 비닐봉지까지 가져와 담느라 정신없다. 도시락에 채운 것은 집에 있는 동생들에게 맛보여 줘야하고 손과 비닐봉지에 것은 얘기꽃을 피우며 논두렁길에서 먹을 분량이다.
헤벌쭉 대며 웃는 아이들 잎과 혀는 금방 검정 물이 배어들었다. 꼴이 우스워 배꼽을 잡기도 하고 혀를 내밀어 색의 농도를 서로 가늠하며 확인하던 즐거운 귀가 길 여름풍경이었다.
승화네 뽕밭을 아주 당당하게 할아버지 앞에서 들어가 오디를 맘껏 따 본적이 있었다. 물론 사전에 옆집이라는 이유로 우리 큰 고모가 허락을 받아두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날처럼 기분 우쭐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고모는 뚜껑까지 달린 큰 양동이를 들었고 나는 졸병 마냥 막걸리주전자 들고 따라갔다. 큰 고모는 어른이니 콩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밟는 일이 없어 쾌히 승낙을 한 것이다.
두근거리며 감시망을 뚫고 들어가 아슬아슬하게 오디를 따는 것에 비하면 고모 뒤를 따르는 일은 참 심심한 일이었다. 마음껏 따가도 된다는 사실에 시간도 급할 게 없었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고모는 얘기상대도 되어주지 않고 잰 손동작으로 양동이만 채우며 가끔 입으로 오디를 물고 있는 꼴을 보기라도 하면 “주전자부터 채워야지!” 하며 동그란 눈을 한 일자로 뜬다.
말 그대로 이건 오디 따는 놀이가 아니라 수확 작업에 동원된 일꾼이다. 그 많은 오디를 뭐 하러 욕심을 내느냐 속으로만 꽁알대며 고모 뒤를 따랐다. 어쩜 한 알도 못 먹게 하는지 고모가 미웠다. 오디를 마음껏 따도 된다는 역사적인 순간에
고모는 정말 나를 작업 인부로만 생각하는 것일까.
해거름이 다 되어서야 고모가 든 양동이와 내 주전자가 채워졌다. 드디어 고모는 나에게 아주 관대한 말투로 “이제부터는 따서 먹어도 된다.”라고 하신다.
집에 가져올 양의 오디를 다 채울 때까지 참고 이제야 먹고 있는 고모를 곁에서 지켜보며 우습기도 했지만 갖가지 생각이 교차되었다. 오디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삶의 궁핍함만이 오디빛으로 물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