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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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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4 - 강냉이 줄


BY 박예천 2008-12-23

 

                    강냉이 줄

 


 

마릿골에도 강냉이 아저씨는 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고물을 수집하는 엿장수로 충실히 임무수행을 하다가 초겨울이 접어들면서 직업전환을 한다. 가을 끝자락까지 들리던 찰찰 가위소리는 강냉이 튀기는 소리로 짐수레 위에 고물 대신 바꿔가던 가락엿이며 빨래비누들은 옥수수강냉이 제조에 필요한 도구들이 되어 실려 있다. 구멍가게 앞 공터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어서 고무신과 양은냄비 구멍난 것을 잘 때우던 정거장 허씨 아저씨도 애용하는 장소이다. 부잣집 앞마당만큼이나 넓기도 했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지나쳐야 하는 곳이다. 막걸리 몇 사발에 시비가 붙어 싸움들도 곧잘 하던 공간이었다. 한마디로 구경거리가 새록새록 생겨주는 마릿골 지정 공연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강냉이아저씨가 공연장에 나타나는 날.

사람들의 모습보다 눈에 먼저 띄는 것이 있다. 어디서 그렇게 크기와 색이 같은 깡통들을 주워 모은 것일까. 근처 미군부대에서 내용물을 비우고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 분유통보다는 조금 큰 국방색 깡통들이 한 줄로 강냉이아저씨의 꼬리처럼 이어져있다. 깡통에 담긴 것들 또한 가지각색이다. 샛노란 옥수수에서부터 쌀알, 콩, 누룽지 말린 것 등등 모두 다르다. 어제 미처 튀겨 내놓지 못한 강냉이 줄이 오늘 아침부터 순번대로 나란히 서 있다. 속초시 교 동 성당앞 강냉이 아저씨는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계와 파란 가스 불까지 피워놓고 휴대전화 받는 여유가 있지만 마릿골 아저씨는 그럴 틈도 재력도 없다. 장작을 작은 도끼로 크기에 알맞게 쪼개랴, 손잡이도 돌려야 하고 가끔 시계 눈금 같은 곳을 들여다보며 ‘뻥이요’ 외칠 준비도 해야 한다.

 

강냉이를 튀기는 삯을 돈 대신 곡식이나 땔감으로 받기도 한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가난한 살림살이의 어떤 집 아이는 넉살좋게 옆에 와서 하루 종일 기계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려주고 강냉이를 얻어간다. 한나절이 지나도 우리 집 옥수수를 담은 깡통은 제자리걸음인 것 같다. 줄을 잘 서야 하는데 점심을 다 먹도록 옥수수는 강냉이로 변신할 생각을 않는다. 깡통의 순서가 바뀔까 곁에서 지켜봐야 하기에 밥 먹을 생각을 못한다. 동생들과 교대를 하고 집으로 들어온 나는 허겁지겁 밥을 먹어 치우고 다시 또 강냉이 깡통들의 일렬종대를 확인하며 우리 집 깡통의 전진을 본다. 겨우 서너 칸 앞서 있을 뿐이다.

 

드디어, 침묵으로 일관하며 묵묵히 단순반복의 일만 진행하던 아저씨가 딱 한번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 ‘뻥이요!’에 주춤 물러나는 구경꾼들.

내가 단골로 두 귀를 막고 숨는 곳은 전봇대 뒤나 장씨네 가게 담벼락이다. 너무 멀리 도망가 있으면 손해를 본다. 기계 입에 철망을 들이대고 쏟아내는 강냉이 파편들이 사방으로 퍼질 때를 기다려 재빠르게 한줌 집어 와야 맛이라도 보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용기와 모험심 없는 아이였다. 단 한 번도 하얀 김 모락모락 피어나는 그때에 강냉이를 손안으로 집어 본적이 없다. 옆집 친구 녀석이 건네주는 몇 알을 얻어먹기만 했다. 사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아주 짧은 순간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사라지는 아이들을 향해 거침없이 심한 욕설로 쫓아내는 강냉이주인 아주머니였다. 도저히 그 욕을 다 먹으며 강냉이를 입안에 넣다가는 목뒤로 넘어 가기 전에 다시 옥수수 알로 변해 버릴 것만 같았다.  

 

아! 겨울하루동안의 해는 왜 이리도 짧게 떠 있다가 제 모습을 숨기는가. 마릿골 공터 앞에 만이라도 두어 시간 더 머물다 가면 안 되는 것인지 벌써 뉘엿뉘엿 사방이 어둑해진다. 아직 우리 집 옥수수 깡통 앞에는 몇 집 것이 더 남아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추운 저녁기운을 참고 서 있는데 아저씨가 단숨에 일침을 놓으며 하는 말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요기서부터는 내일 와라.  순서 잘 외우고 있으니 걱정 말고 말이다. 어서들 집에 가라”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집에 온 나는 저녁밥도 먹기 싫다. 내일은 정말 우리 옥수수가 깡통을 벗어나 흰 광목 자루 속으로 가득 들어 갈 수 있는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낮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오며 동생들과 교대를 할 때 약삭빠른 어느 녀석이 새치기를 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겨울밤은 또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가. 아니, 사실은 길고 긴 것이 겨울밤이다.

 

다음날 어김없이 마릿골 공연장에 나타난 강냉이아저씨를 본다. 배운 지식은 없고 가난으로 찌든 땟물이 옷 구석구석에 붙어있는 분이지만 약속만큼은 철저하게 지킨다. 어제의 순번대로 옥수수 깡통을 접수받는 꼼꼼한 아저씨이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우리 강냉이가 나왔다.

튀겨온 강냉이를 마음껏 먹을 수는 없다. 할머니의 손을 거쳐 벽장 속에 감금 된 강냉이 자루는 배급처럼 퍼 줄 때만 먹어야 한다. 설날 엿 고아 강정을 만들어야 하기에 할머니는 고이고이 숨기며 나와 동생들만 조금씩 맛보여 주셨다. 아껴먹으며 입 속에서 단맛이 넘쳐 쓴 내 나도록 녹아지던 강냉이 사카린냄새가 지금도 혀끝에 남아있는 듯하다.

요즘은 얼마나 많은 먹을거리들이 넘쳐나는지 모른다. 골라먹다 지쳐 우리 아이들은 남기거나 버리기가 일쑤이다.

턱 괴고 눈발처럼 쏟아져 나오는 강냉이를 기다렸던 마음을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