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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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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훈련 1학기


BY 박예천 2008-12-23

 

극기훈련 1학기

 


교문 앞에 서있는 엄마를 향해 아이가 달려온다. 양손에 실내와 한 짝씩을 들고 머리카락 나풀대며 함박웃음으로 온다. 등에 매달린 책가방도 덩달아 출렁거린다. 선물인양 때 묻은 실내화를 내민다. 가방까지 넘겨받고 보니 무게가 평소 같지 않다. 돌덩이라도 들어있는 걸까. 가방 속에 2학기 새 책이 빼곡하다. 어느새 녀석은 1학기를 무사히 마친 것이다.


일반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던 지난해 겨울.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과연 옳은 판단이었는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특수학급이 있는 시내중심의 학교를 마다하고 굳이 외곽에 위치한 곳을 선택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학년별 학급이 하나뿐이고 학생도 적어 활동하기에 큰문제가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임시 소집 일에 서류작성을 마치고 드디어 입학식이 다가왔다.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아들은 보통의 아이들보다 오히려 훤칠했다. 어딜 봐서 장애아로 여기겠는가.

허나 겉모양일 뿐이었다. 입학식 내내 쪼그라든 어미의 가슴을 더욱 옥죄는 행동을 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제대로 하는가 싶더니 애국가 부르는 순간엔 딴 짓이다. 국기는 외면한 채 혼자만 학생들 쪽으로 돌아서서 깔깔대며 웃는다. 합창하는 입모양이 우스웠던 모양이다. 의자에 앉아서도 두 다리를 모아 두질 않는다. 벌떡 일어서는가 하면 바닥에 쾅쾅 구르기도 한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시선들이 바늘 끝으로 날을 세우고 내 얼굴에 와 박힌다. 금방이라도 입학과 동시에 퇴학이라며 내침을 당할 것만 같았다.


삼월 한 달 아들 곁에서 요동치며 불어댄 폭풍은, 내가 살아낸 사십년의 세월보다 더한 깊이의 격동이었다.  

어느 날, 입을 꾹 다물고 일상적인 말조차 못하던 녀석이 잠자리에 누워 중얼거린다.

“막대기로 때렸어요. 엉덩이 맞았어요. 엉엉 울었어요!”

무의미한 중얼거림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침이 되고 짝꿍이 또박또박 들려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믿기 싫었다. 한자리에서 선생님께 붙들려 엉덩이를 열다섯 대나 맞았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갑자기 밀어닥친 규칙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힘겨웠던 아들. 그래서 튀는 행동을 보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매를 버는 짓만 골라 했으리라. 체벌이 최후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12년간 잠자던 장롱면허를 박차고 아들을 집과 먼 학교로 매일 태워 날랐건만, 갈등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진즉에 특수학급으로 보내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어느 날 선생님은 노골적으로 말했다. 아동수가 많은 다른 학교로 보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 무리에 휩쓸려 지내면 좋겠다는 거다.


우왕좌왕 전문가를 찾아 상담을 하고, 아들의 고정치료선생님도 만났다. 모두 한결같은 말씀이다. 엄마가 힘들더라도 버텨주기를 바란다고. 그것이 우리 아들 같은 장애아의 또 다른 미래를 위해 디딤돌이 될 것이라 했다. 순간, 이기심이 발동했다. 내 코가 석자인 상황에 어찌 다른 아이들의 앞날까지 바라본단 말인가. 죽을 결심 여러 번에 다 쏟아버려 마른 줄로만 알았던 눈물이 날이면 날마다 흘렀다. 내공이 쌓이기엔 인고의 세월분량이 적은 모양이다. 


독을 품는다고 해야 맞을까. 아니, 낯이 두꺼워지기로 했다. 결심을 바꾼 그 날 부터 나는 독립투사가 되어있었다. 진심은 통한다는 각오아래 우선 선생님을 내 편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것은 뇌물공세나 아부가 아니었다. 선생님을 향한 나의 철저한 신뢰감의 표현이었다. 아들을 학교에 맡긴 이상, 수업시간 만큼은 내 아들이 아니라고 정해버렸다. 문제행동이 있을 때마다 저자세로 임하지도 않았다. 미리 아들의 심리상태 등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선입견으로 바라볼 우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생님과 아들이 부딪히며 관계를 엮어 나가가기를 바랐다.    

두어 달이 지나면서 과연 아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등교 길을 싫어할  텐데 표정이 밝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루를 잘 버텨 준 기특함이 밀려와 으스러져라 품에 안아주곤 했다.

아들의 학습이 향상되는 것 보다 친구를 알고 배려하며 기다림도 배웠으면 했다. 남편과 나는, 아들이 1학년 무사히 마치는 날 파티를 해주자고 했다. 극기 훈련 잘 이겨낸 것 축하하는 의미에서 자리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절반의 훈련이 끝난 장한 아들이 때 묻은 실내화를 달랑거리며 운동장이 꺼져라 달음박질을 친다.

녀석의 머릿속 ‘학교’라는 의미가 아침이면 가고 점심 먹은 후 교문 앞 엄마차를 만나는 곳으로 여기겠지만, 그래도 자기 소속을 분명히 안다. 1학년 1반 2번.

방학식을 마친 아들의 가방에 숙제목록과 생활통지표가 들어있다. 과목마다 성적은 표시되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정성어린 글이 가득하다. 입학초기보다 차분해졌으며, 친구들과 어울릴 줄도 안다고 적혀있다. 가능성이 보인다는 희망적인 내용도 함께.

늦게 가는 아이. 퇴행도 정체도 아닌 그저 생각걸음이 느린 녀석이 내 아들이다. 


지난 봄 내내, 나는 아들과 함께 초등학교1학년이었다.

첫 여름 방학은 꿀맛일 거다. 한 학기동안 조였던 긴장의 끈을 풀어보며 며칠만이라도 수세미머리 늦잠꾸러기가 되어보련다.


졸음이 쏟아진다.


2006년 7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