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에도 성별이 있다?
“아이가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여자아이인데요.”
이 부분까지의 내용으로는 산부인과의사와 나눔직한 대화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그러나 병원은 아니다.
아이의 성별을 물어본 사람은 문방구 아줌마요, 대답을 한 이는 바로 나이다.
아들과 강릉을 다녀오는 길, 지난주에 과학교실 준비물이라며 딸아이가 파일 하나를 사야한다고 말한 것이 떠올라 큰길 옆 문방구에 들렀다.
적당한 크기에 속지매수만을 염두하고 들어간 나는 성별을 묻는 주인여자의 물음에 조금은 당황했다. 내 대답을 들으며 높은 진열장에서 분홍색 표지의 파일을 꺼내 준다.
그러니까 여자라서 분홍색이 좋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지닌 평범한 아줌마이다.
평소에 나는 딸에게 굳이 붉은 계열의 색 옷만을 고집하여 입히지 않았다.
당연히 아들 역시도 파란색이나 어두운 색만을 선택하여 입히거나 신기는 것을 싫어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색이면 어떤 것을 지녀도 좋다고 늘 아이에게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래서 일부러 라도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히고 물건들도 그렇게 사주곤 했다.
유치원을 다니면서 딸아이가 가끔 집에 와 볼멘소리를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파란계열이거나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고가면, 친구들이 놀린다고 했다.
왜 남자색을 입고 왔느냐고 말한다는 것이다.
물론 파란색은 강하게 느껴지고 붉은 색조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니 여성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작은 현상에서 남자와 여자의 성을 색으로조차 일찌감치 구분 짓는 어른들의 잘못된 시각을 본다.
어릴 때 나도 그렇게 정해주는 색감을 익히며 자랐다.
빨간색 옷을 즐겨 입히고 어둡고 파란계통의 색은 남동생들 차지였던 것 같다.
나는 파란색과 초록색을 좋아한다.
선택의 여지없이 여자의 색을 정해주니 그 속에 나를 감추고 있었다.
어른들의 영향력은 어찌나 크던지 스무 살이 넘도록 선뜻 소위 남자색이라고 이름 짓는 것들이 쉽게 택하여지지가 않았다. 용기가 필요했고 주위의 시선들이 나한테 몰려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마저 생겼다.
성격까지도 색조에 지배를 받나보다.
과감하거나 용단을 내릴 때에도 소심하게 행동을 했다.
유치원교사로 근무하던 당시 아이들에게는 그런 색깔의 구분을 주지 않으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이 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힘에 겨운 일이었다.
가정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부모들이 정해주는 색으로 또 그렇게 남자와 여자를 정하고 있었다. 색종이 접기를 하는 미술놀이 시간에조차 색 이름에 성별을 정하는 듯 선택하는 것을 보았다. 무심코 어떤 남자아이가 빨간 색종이를 집어 들면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것을 종종 보았다. 가정과 유치원의 일관되지 않은 교육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혼란만을 줄뿐이었다.
역할에 대한 아이의 생각을 이해시키는데도 어려움은 있었다. 장래희망을 물어보니 여성스러운 직업만을 이야기한다.
내가 슬쩍 고의적으로 다른 일하는 사람도 있다고 권해보니, “그건 남자들이 하는 거잖아” 하며 엄마인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아무리 남자와 여자의 일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자기가 좋으면 할 수도 있다고 설명을 해주어도 납득이 되지 않는 얼굴표정이다.
시댁에 갔을 때였다.
딸아이가 할머니 앞에서 “엄마는 참 힘들겠어요. 너무 많은 일을 하니까.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 뜨개질....., 이렇게 많잖아.” 하고 말했다.
곁에서 듣고 계시던 어머님이 “엄마보다, 아빠가 더 힘든 거야. 아빠는 돈 벌어 오고, 엄마는 집에만 있잖니?” 하시는 것이다.
외치고 싶었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고.
당장 딸아이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이참, 엄마는 그게 아니라고 했는데,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거야?”
남자일, 여자일 모두 소중하고 똑같은 분량으로 일한다고 말해왔기에 딸아이는 혼동이 되는 것이다.
어머님도 여자이면서 어찌 평등의 원리를 주장하지 않으시는 걸까.
말대꾸로 여기실 까봐 듣고만 있었으나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이미 나라에서도 여성부가 생기고 여자들의 목소리가 우리 어머니세대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있어진 것은 사실이다.
누가 위에 있어야 하느니 하는 따위의 성별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 아이들이 자유롭게 의지대로 좋아하는 색깔을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을 인정해주는 엄마이고 싶다.
개성을 드러내며 자기 색을 지닐 수 있었으면 한다.
물론 혐오감을 주거나 공동사회에서 지나치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하겠다.
아들이 놀이방에 갈 시간이다.
이것저것 입힐 옷을 찾다가 문방구 주인여자를 떠올려보며, 딸아이가 입던 빨간색 셔츠를 입혀본다.
다양한 색깔을 접하면서 생각의 폭도 넓어지기를 바라는 나는 극성엄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