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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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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습결빙지역


BY 박예천 2008-12-23

 

상습결빙지역

 


강원도의 산길은 굽이굽이 고개마다 사연이 숨어있다. 곧게 펴놓은 고속도로에서는 냅다 달려야만 하기 때문에 미처 산의 이야기를 들을 새가없다. 그래서인지 시댁으로 향하는 여러 개의 고갯길 중, 남편은 미시령국도를 자주 이용한다. 가다가 차를 세우고 쉬는 곳이 휴게소가 되고,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면 사진기에 담기도 한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운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마음껏 밖을 내다볼 수 있다. 다른 계절보다 특히 겨울 산을 넘는 일에는 항상 위험이 따른다. 급커브로 돌아가는 길목마다 안내표지판이 붙어있다. 위험을 알리는 갖가지 내용 중 유독 ‘상습결빙지역’ 이라는 문구에 시선이 머문다. 상습적으로 얼어버리는 지형이니 조심하라는 말이다. 높은 산 그림자에 가려 빛이 머물 틈이 없는 곳. 게다가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영락없이 빙판길이 된다.

 

햇볕 잘 들어 따스했던 정남향 고향집의 아버지형제들 사이는 언제부터 얼어버린 것일까.

오 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난 아버지. 당시 누구네 아들들이 그러했듯이, 장남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 있었다. 일용할 양식이 풍족하지 못했던 때에 할머니는 끼니마다 짓는 밥에도 차별을 두었다. 솥단지에 꽁보리밥이 그득하니 익어 가는 가운데 주먹만 하게 쌀밥을 박아놓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만 드렸다는 것이다. 먹을 것으로 인한 설움이 제일 크다고 했던가. 원인은 분명히 모르겠지만, 아버지 형제들의 피맺히는 냉기는 하루 이틀 자란 고드름이 아니다. 평소 숙부님과 세 고모들의 핏대 세우는 목소리를 자주 들어왔기에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졌던 맏이의 책임감은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이었을까. 나고 자라면서 들어온 것이 아버지에 대한 나머지 형제분들의 불만스런 원성이었다. 막상 아버지를 대하면 침묵으로 일관하면서도, 자식인 내 앞에서는 봇물 터지듯 흉을 늘어놓았다. 이야기 속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이고, 핏줄도 외면하는 몰인정한 인간이 된다. 정말 아버지는 등 따습고 배부른 세월만 살아왔던가.

일찌감치 집안 모든 살림의 경제권을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명문 세도가의 시어머니가 곳간 열쇠를 며느리에게 물려주듯 했다면 기세가 등등하고 호기부릴만한 일이었을 거다. 허나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몇 마지기 되지도 않는 땅뙈기뿐인 살림에 무슨 격식과 권리양도가 필요했겠는가. 오히려 노부모와 줄줄이 딸린 동생들, 삼 남매 자식까지 굶주리고 헐벗기지 않으려는 중압감에 시달렸으리라. 

 

기억 속의 아버지 옷차림은 늘 국방색이었다. 직업군인도 아니면서 질기다는 군복을 어디서 구해왔는지 더덕더덕 누비고 꿰매 입으셨다. 얼마나 천을 덧대었는지 무릎과 엉덩이부분은 뻣뻣한 나무판자의 질감이었다. 신발은 또 어떠했는가. 짚수세미 비벼 닦을 필요도 없는 검정고무신이었다. 내가 사춘기를 넘기도록 아버지는 초라했고 기름기 다 빠져 푸석거리는 피부에 굳은살만 가득했다. 미간에 내 천(川)자가 새겨진 얼굴표정으로 전전긍긍 빠듯한 살림살이만을 걱정했다. 혼자 딴 주머니 알토란 불리듯 챙겼다면 궁색한 표정이 얼굴에 각인 되지 않았을 거다. 한숨으로 긴긴밤을 지새우는 일 또한 없었을 테지.

굳이 아버지의 결점을 끄집어내라면 무뚝뚝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에 있었다. 단돈 십 원에도 벌벌 떨며 너그럽지 못했다.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아야 모인다는 고집스런 철칙을 지니셨다. 그래서 혼자만 뒷돈 챙기며 욕심의 배를 불린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나보다.

형제들 사이 오스스한 냉기가 돌다 못해 얼어버린 이유를 누구 탓으로 돌려야하는지 모르겠다. 찢어지게 가난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 집 현실보다 더 형편없던 이웃들도 형제끼리 불신하거나 헐뜯지는 않았다. 그것은 시대적인 아픔이었다.

 

맏이라서 그랬는지, 집안 장조카인 나는 내내 안타까움에 얽매이곤 했다. 아버지세대에 상습적으로 얼어버렸던 앙금이 대물림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조카들이 앞장서서 연결고리가 될 수는 없을까 고심했다. 결국 내가 선구자가 되기로 했다. 자손들인 우리세대에서 뭉쳐보기로 작정하고 작은 모임이라도 만들기를 제안했다. 처음 얼마간은 외사촌, 고종사촌 끈끈하게 끓어오르는가 싶었는데 의욕만큼 결실이 없었다. 부모세대 ‘상습결빙지역’을 해결하기엔 자식들의 노력이 역부족이었던 걸까. 다른 방법을 모색하며 여러 차례 시도를 거듭했으나 되돌아오는 것은 상처뿐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순수한 동기가 묵살 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를 그때 비로소 알았다. 적어도 고모들은 내 진심을 믿어주고 고마워해 줄 것이라 여겼다.

급기야 이번에는 내 쪽에서 굳세게 빗장을 닫아걸었다. 위로 부모와, 옆으로 내 형제만 챙기며 살리라 결심했다. 상습적인 결빙지역의 테두리에 버젓이 못질을 해버렸다. 철저히 외면하고 살 것이며, 어차피 도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부모의 형제들 일일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시베리아 찬바람 세월 몇 년을 무던하게 잘 살았다. 일부러 잊고 지내니 별 불편함도 없었다.

 

시골동생으로부터 막내고모 아들이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는 전화를 받은 것은, 아침부터 겨울한기 만만치 않게 흩날리던 날이었다. 솟구치는 오열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내 탓 인 것만 같아 꼬박 일주일을 울었다.

마음이 진정된 며칠 뒤, 떨리는 손으로 용기 내어 수화기를 집어 드니 고모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뭔가 뜨끈한 덩어리들이 목안을 넘나들며 다시 핏줄을 엮어놓는다. 인력으로는 절대 끊어질 수 없었던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기쁨을 나누어 배로 할 수 없었던 지난날들이었다면, 슬픔이라도 반으로 접어주어야 했다. 햇볕이 들어설 틈이 없도록 거대한 그림자가 가리고 있어 상습적으로 얼어버리면, 대 공사를 벌여야 하는 것이다. 굽이굽이 상처 많은 옛 고개는 터널을 뚫어서라도 잊어버려야한다.

 병을 얻은 사촌동생이 제 몸에 불을 지피며 아버지 형제들 사이를 녹이고 있다. 오래 굳어있던 불신의 빙벽들이 서서히 흘러내린다. 가족들은 오직 한 가지 기도의 마음으로 이제 나이 열일곱 사촌동생의 투병을 돕는다. 

 

“누나, 너무 힘들어. 먹은 거 타 토하고....속 쓰려.”

항암치료가 고통스러운 사촌동생이 불혹의 누이 앞으로 문자를 찍어 보냈다.

힘내라는 답장을 보내며 멀리 설악산 줄기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