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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3 - 마릿골 백화점


BY 박예천 2008-12-22

마릿골 백화점

 

 

 

 

마릿골 장씨네 가게는 동네에서 하나뿐인 백화점이다. 지금이야 동네를 통 털어 네 곳이나 구멍가게가 생겼지만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유일하게 하나뿐인 가게여서 상권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것이 동네 부녀 회에서 운영하는 공판장이 당골 마을회관 앞에 생기고, 두 곳이 더 있어지면서 스크루우지 같았던 장씨가 조금씩 너그러운 얼굴이 되어갔다. 규모는 작고 어둠침침한 공간이었지만, 없는 물건이 없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아이들 군것질거리에서부터 간단한 식료품과 학용품까지 드러나 있지 않아도 찾기만 하면 척척 나온다. 뒤쪽으로 물건을 쟁여두는 또 하나의 방이 있어서 그런지 조그만 자리인데도 종류가 다양하게 많다.

 

손님이 없는 나른한 오후. 총채를 들고 과자봉지 위며, 파리약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있는 장삼득씨를 자주 본다. 천장에 화학조미료들이 동그란 틀에 매달려 바람결에 춤추는데 색이 바랬고 파리똥 자국도 꽤 많다. 도대체 원래 유효기간이 언제까지인지 내가 보기에도 꽤 여러 날들을 공중회전 해온 것으로 알고있다. 어른들끼리 하는 말을 살짝 전해들은 적이 있는데 물건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것이다. 읍내까지 가려면 버스시간에 맞추어야 하고, 급한 물건은 장날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간혹 그곳을 이용하게 된다는 것.

 

가게 안 부엌을 겸한 곳은 엉성하게나마 나무탁자도 있어서 동네 어른들이 막걸리 사발이라도 걸칠 양이면 자주 찾는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왁자하게 들리는 웃음소리가 있는가하면 금방이라도 주먹이 올라갈 듯 멱살을 부여잡으며 싸움질하는 모습도 간간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시골중학교 선생님들이 마땅히 갈만한 대포 집이 없는 허름한 촌마을 가게는 근무후의 모임자리로도 탈바꿈한다. 기차역전이 있던 이웃마을에 가면, ‘실비옥’이라는 페인트간판 붙은 색시 집이 있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 선생님들은 장씨네 가게에서 가끔 술잔을 기울이셨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들렀다가 눈이 마주쳐 어색한 목례를 하면, 얼굴이 벌겋게 되신 우리 담임선생님은 평소 수업시간에서는 볼 수 없는 촌 아저씨로 돌아와 내게 농담을 건네신다.  

 

물건은 사야하는데 집안에 돈이 없을 때면, 쌀 됫박이나 씨암탉이 한 개씩 낳은 계란을 모아 가게로 들고 간다. 그 값을 쳐주는 일에도 어찌나 인색하게 처리하는지 동네사람들은 웬만하면 물물교환 하는 것을 꺼려했다. 장에 내다 팔면 후하게 쳐 받을 가치도 가게 물건과 맞바꾸게 될 때는 뒤끝이 영 찜찜해지는 것이다. 물건 흥정 잘 하시는 우리 할머니가 계란꾸러미를 들고 가면 제 값을 톡톡히 받으시지만, 행여 그 역할을 내가 대신하게 되는 날은 연세 지긋한 장씨 아저씨와 따지고 들 용기가 없어 숙맥처럼 주는 대로 받아온다.

마을 사람들 거의가 외상장부 하나씩 장씨 가게에 두고 있을 것이다. 추수 끝이나 설날 되기 전인 섣달 그믐날까지는 외상값을 갚아주어야 또 물건을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다.

 

장삼득씨 자녀들은 서울로 시집도 가고, 아들들은 공부하러 떠나있어 두 부부만 가게를 지킨다. 방학을 맞은 작은아들이 아버지 대신하여 가게를 보는 날, 그곳에 들리는 내 얼굴이 발갛게 홍시가 된다. 촌에서 소 풀 뜯기거나 농사일 거드는 청년들과는 달리 반짝거리는 은테안경에 막걸리 빛 뽀얀 피부가 도시냄새를 풍겼었다. 가게를 보는 틈틈이 의자에 앉아 제목도 모를 두꺼운 책을 읽는 모습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물건 살 일도 없으면서 괜히 가게 앞을 빙빙거리며 놀던 내 사춘기 소녀시절이었다.

 

겨울로 접어들어 농한기가 되면, 가게 뒷방은 할머니들 쌈지 돈이 드나드는 화투판이 벌어진다. 기껏해야 일원 짜리 동전들이 나오는 게 전부이지만 성격 걸걸한 강원도 할머니나 당골 아주머니 목소리가 골목길까지 쩌렁쩌렁 울릴 때는 돈을 따고 잃는 순간들이다. 우리 할머니도 고모가 손뜨개로 만들어준 동전주머니에 가득하니 모았다가 그 판에 끼어 마실 다녀오곤 했다. 점심진지를 드시라고 할머니를 모시러 갈 때면 어두컴컴한 방에서 군용 담요를 펼쳐놓고 화투장이 돌고 있었다. 자리를 뜨는 일은 길옆으로 난 문을 열고 뒷간을 갈 때뿐이다.

 

방안에 오밀조밀 앉으신 할머니들 모임과는 달리, 가게 앞 넓은 공터에는 멍석이 깔리고 내기 윷놀이가 벌어진다. 한 묶음 윷들이 손에서 벗어나 하늘높이 떠올랐다 패대기쳐지는 순간, 희비가 엇갈리는 함성소리는 마릿골 하늘을 두 쪽이라도 낼 듯이 크다. 말판 옆으로는 벌써 한잔씩 나눈 흔적인지 장씨네표 막걸리 주전자와 안주 몇 점이 놓여있다. 나는 윷놀이 판이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가 하는 것엔 통 관심이 없었다. 말판이 놓여질 때 퍼붓는 동네 어른들의 거친 욕설이나, 어린아이처럼 배 움켜쥐고 웃는 백발노인의 모습이 더 흥미로운 구경거리이다.    

 

언제든 장삼득씨 가게 앞에만 오면 한눈에 동네 돌아가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누구 집 돼지새끼가 낳다가 죽어 몇 마리 남았으며, 어느 댁 딸의 혼사 날이 언제인가도 훤히 들을 수 있는 사통팔달 정보장소였다.

이제 장삼득 씨도 고인이 된지 오래 이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구멍가게로 남아 부인되시는 분 혼자 쓸쓸히 지키고 있다. 친정 가는 길에 보니 허드렛물 버리러 나오시는 그 아주머니 허리도 굽고, 많이 노쇠해 보였다.  


백원 짜리 환희담배 매캐한 연기가 틈새마다 스며있을 추억의 마릿골 백화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