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달리기
손에 땀을 쥔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청백색 배턴 한 토막이 다음주자에게 건네질 때마다 늘어선 관중들의 함성이 운동장을 가른다. 펄럭이는 만국기도 응원단이다. 가을바람결 따라 형형색색 갈채를 하늘위에 수놓고 있다. 드넓은 땅바닥엔 단 두 사람만이 전력질주를 한다. 역시 가을운동회의 백미는 이어달리기다. 주위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섰건만 딱 두 패다. 청군 아니면 백군 이겨라!
이때만큼은 솜사탕기계도 숨을 죽이고 좌판 위에 조악한 장난감들도 한마음으로 뭉친다. 과연 흥분의 도가니다.
앙숙이었던 영희네와 철수엄마가 한편인가보다. 체면치레는 일찌감치 내던지고 맞잡은 손을 들며 목소리를 높인다. 아이들 운동회가 순식간에 동네어른들 목청시합으로 번졌다.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 것은 내가 학부형이라는 사실이다. 딸아이 나이가 열 살이 되었으니 세 번의 운동회가 있었건만 학교행사가 있을 적마다 누구의 어머니인 것을 잊는다. 몸 나이는 잔뜩 먹었건만 마음은 동심이다. 소풍날 받아놓은 아이마냥 며칠 전부터 나 자신이 더 들떠있었으니.
딸아이는 안중에도 없고 학교 울타리주변을 맴돌며 장사꾼구경부터 했다. 세월을 몇 십 년 되짚으며 까마득한 유년의 운동회를 퍼 올려보니 천태만상으로 변했다. 막걸리사발을 뒤엎으며 멱살잡이하던 주정뱅이도 없고, 감초마냥 남 얘기에 잘 끼어드는 뺑덕어멈도 안 보인다. 반나절 내내 두리번거려 봐도 낯익은 얼굴하나 나타나질 않는다. 이것저것 아이들 재롱도 현대화의 물결이다. 다만 예나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어달리기 지켜보는 맛이다. 까마득하게 모여든 사람들이 오직 한목소리로 부르짖는 혼연일체를 생각해보라.
분명 내 딸은 청군이라고 귀에 딱지가 붙게 외쳤었다.
아슬아슬한 차이를 두고 달리는 계주선수들 앞에 나는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드디어 청군을 따라잡는 백군선수를 향해 환호를 질러댔으니 딸아이가 그 모습을 안 본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미 어느 편이 이기고 지는 승부에 관심이 사라진지 오래다. 두 선수사이 폭이 좁아지기만 하여도 가슴이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아! 자식과 달음박질을 함께 하고 싶었던 어머니 한분. 결국 선수 곁으로 바짝 다가가더니 죽어라 뛰며 몸소 응원한다. 최신사진기 들이대는 가족을 향해 달리다말고 가벼운 포즈까지 취해주는 청군선수. 승부다툼을 해야 마땅한 달리기에서 말이다. 그 탓에 두 사람 폭이 벌이진다. 지켜보는 무리들이 파안대소를 하고 만다.
달리는아이들 모습 또한 볼만한 그림이다. 웬만한 명랑만화 한편 보는 것과 맘먹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실룩거리질 않나, 고개를 시계바늘 여섯시 오 분전 모양을 하고 달리기도 한다. 잠깐사이 엄청난 구경거리가 파노라마로 엮어진다. 어떠한 자세로 달리든 혼신의 힘을 다해 다음선수에게 배턴을 넘겨주겠다는 일념만 눈동자에 실려 있다.
인생을 이어달리기하는 마음자세로만 살아낸다면, 그리하여 넘겨줄 이에게도 의기양양 배턴을 건네준다면야 후회 없는 삶이라하겠다.
내 앞 주자는 누구였을까.
가난과 씨름하며 애면글면 고생하신 아버지였을지, 부족한 문학적 감수성이나마 다독여준 막내고모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 가족이 아닌 사람이 기를 모으고 땀을 쏟으며 응축된 덩어리를 건네고 갔는지도 모른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나보다 앞선 시간의 경험자이다. 움켜쥔 배턴에 힘을 모아 살아볼 일이다. 여유 작작 하다보면 세월만 무심하게 흐를 것이다. 다음주자에게 껍데기 아닌 건더기라도 넘겨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들의 교가제창이 가을 저물녘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운동회는 막을 내렸다. 만국기는 잘 포개지고 코 묻은 돈벌이 좌판도 걷어갔겠다.
모였던 사람들 가슴마다 배턴 한 개씩 품고 자기 집으로 간다. 청군이면 어떻고 백군이어도 괜찮다. 제대로 한 맘으로만 달리면 되는 것이다.
흙먼지 진종일 묻히고 달려온 밤이 피곤에 절은 배턴을 넘겨주고 간다.
일출과 함께 밝아올 새 날 아침이 또 이어달리기를 시작하겠지.
2005년 10월 14일 딸아이 운동회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