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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55번 황순남씨


BY 박예천 2008-12-22

 

55번 황순남씨

 


처음엔 숙달된 조교의 시범인줄로만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늘 같은 태도일수가 있을까.

서비스직종이거나, 영업직에 몸담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여직원들이 이른 아침 문을 열기 전, 마치 손님이 곁에 있는 양 미소연습을 한다지 않는가.

보험영업 하는 직원들도 고객을 만나러 가기 전에 힘찬 구호를 외치며 안면에 미소 머금기 연습을 한다고 들었다.

황순남씨의 친절도 오랜 학습으로 인한 결과물일까?

평소에도 엉뚱한 나의 호기심이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아들은 소아과, 나는 이비인후과에 가는 길.

일부러 버스를 타게 되었다. 

가끔 나는 버스타기를 좋아한다.

아니,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람구경에 흥미를 갖고 있다.

대충 겉모습만으로 생활정도를 점쳐보고, 말투 등으로 성격을 넘겨 짚어보며 머릿속에 오만가지 이야기를 엮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사람구경하며 상상 속에 빠지는 것이 즐거웠다.

아들과 동행하는 날에 내 입은 쉴 틈이 없다.

낱낱이 설명해줘야 하고, 차안은 물론이요 창밖의 풍경까지 읽어줘야 한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그의 이름이 황순남 이라는 것도 실은 오늘 오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속초시내버스 55번 운전기사이며 차량번호가 1220번이라는 것도.

버스 앞문이 열리고, 요금 통에 돈을 넣으며 아들을 앞세워 계단에 올랐다.

“꼬마야, 안녕!”

아들 손을 잡고 들어서는 뚱뚱한 삼십대 여자에게도 늦을세라 인사를 한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목례를 했다.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아들의 뒤 자석에 앉는다. 


드디어 나의 사람살피기 병의 바이러스가 버스 안을 후비고 다닌다.

헌데, 오늘은 운전대 잡고 연실 인사를 뿜어대는 황순남씨 때문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분산시키지 못한다.

올라오는 손님마다 한결같이 인사를 한다.

내릴 때는 또 어떠한가.

“안녕히 가십시오.”

황순남씨는 어디서 그리도 아름다운 버르장머리를 배운 것일까.

그의 손님향한 연령별 접대는 세세하게 다르다.

몸이 불편하여 허리 굽히기 힘든 이라면, 요금 통에서 나오는 거스름돈을 직접집어 손에 건네준다.

어디 그뿐인가.

백발성성하고 기운 없어 보이는 노인이 등장하면, 거침없이 핸들위에 얹혀있던 목장갑 낀 손을 내민다.

검버섯 그을리고 쭈글쭈글한 노인의 손은 백색의 목장갑위에서 잠시 행복하다.

비틀거리며 통로를 걷는 할아버지가 자리 찾아 앉을 때까지 출발하지 않는 배려.

목적지에 도착한 노인의 뒤뚱거리는 하차절차에도 묵묵히 기다려준다.


벨을 누르고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리려하자 역시 뒤통수에 와 닿는 우렁찬 목소리.

“안녕히 가세요!”

그동안 사람들 많은 버스 안에서 차마 용기 없어 못했던 답례를 특유의 아줌마 목청으로 외쳐댔다.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얼굴이 화끈거리고 목안이 간질거렸다.

이비인후과에서 말했듯이 목이 부은 탓일 게야.


나는 불의를 보면 발끈하고 참지 못한다.

정의로움 또한 보았으니 오지랖 넓은 내가 가만있을 리 없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을 뒤져 버스회사를 찾으니, 도통 보이지 않는다.

결국 시청게시판을 뒤져 ‘칭찬 합시다’ 코너에 한 치의 보탬도 없이 보고 느낀 바를 적었다. 

글을 적어놓고 목록을 보던 나는 또 한번 놀라고 만다.

황순남씨에 관한 글이 오늘 말고도 꽤 여러 번 있는 것이다.

클릭 하여 읽어보는데, 오전에 버스 안에서보다 몇 배로 가슴은 뜨거워지고 있었다.   


어느 아기엄마의 글.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 갑자기 소변이 마렵다기에 세워줄 것을 부탁했지요.

기다릴 테니 볼일 보고 다시타세요 하는 겁니다.


여학생이 적은 글도 있었다.

어른이 먼저 인사를 하니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배울 점이 많았다. 등등

모두가 칭찬일색이었다.

대도시 어느 버스에서 이런 기사양반을 볼 수 있을까.

물론 밀리고 지치는 만원버스 안에서야 꿈도 못 꾸어볼 그림이겠지.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자연적인 환경조건에 영향을 받은 심성일지도 모르겠다.


시청게시판에 적어 놓은 글로는 뭔가 개운치가 않다.

버스회사에 전화를 했다.

승객의 한사람으로서 회사에서 포상제도가 있다면 적극추천하고 싶다면서.

버스번호와 이름을 대자 전화기너머에서 허허 웃는다.

벌써 도지사상을 타신 분이랍니다.

멋쩍은 목소리로 말을 맺으며 조그맣게 독백으로 말줄임표를 찍는다.

대통령상으로 주지.


세상 어디에도 살만한 곳 없고, 눈을 씻고 봐도 도둑놈뿐이란다.

혈연지간에 칼을 들이대고, 돈이면 다 되는 시대이다.

택시와 자가용을 집어던지고 자꾸만 버스를 타고 싶게 만드는 황순남씨.


눈이 탁해지고, 마음이 주저앉는 날에 나는 55번 버스를 타러 갈 거다.

사인이라도 미리 받아놔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