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두해 따 드시고 돌아가셨어”
전화선 너머 친정어머니 목소리는 뿌연 아득함과 겹쳐 전해졌다.
친정뒤란을 퍼 올리던 내 기억의 갈퀴는 무딜 대로 무디어져 긁어모아도 건더기가 없다. 명절에나 겨우 한나절 고개 내미는 것으로 자식의 도리를 대신한지 여러 해.
장독대는 어디쯤에 있었고, 여름마다 호박넝쿨은 담벼락을 여전히 타오르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애지중지 가꾸던 어머니의 화단에 작약이며 백합이 봉오리를 오므렸을까, 터뜨렸을까.
상황이 이러한데 살구나무 서있는 위치를 알 턱이 없다. 백치가 되어버린 양 누가 심었느냐는 딸의 물음에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 하나뿐인 손녀딸 끔찍이도 아끼던 할아버지가 남기신 나무인 것을.
심어 가꾸었는데 열매 맛을 보신 건 딱 두해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또 울컥거린다.
살구가 실하게 달렸다는 친정어머니 목소리에 얼마 전부터 걱정이 실려 있었다. 미처 먹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신맛에 인상을 찌푸리고, 자꾸 농익어 가는데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하는듯했다. 자신만만하게 나에게 달라 큰소리를 쳤다.
하루 만에 택배상자에 담겨 속초바다를 찾아온 살구 알들. 족히 한광주리는 넘고도 남을 양이다. 무르고 터진 것은 따로 옮기고 성한 것을 골라 담았다. 물에 씻으며 한입씩 베어 물으니 과육이 싱싱하고 향이 좋다.
조상들의 지혜로운 음식저장법을 이제부터 발휘할 차례이다.
염장법은 젓갈류를 만들 때 쓰이니, 잼을 만드는 데는 당연히 당장법이렷다. 소금 절임과 달리 당장법은 농도가 짙어도 금방 먹을 수 있다. 식품영향학적으로 구체적인 이유는 들지 못하지만, 어쨌든 살구를 오래 보관할 수 있겠다싶어 친정어머니를 졸랐다. 원료 공급처인 친정에 가공식품으로 돌려드려야지.
잘 익은 살구의 물기가 빠지도록 건져놓고, 반쪽을 내어 숨은 씨앗을 빼내는데 자꾸만 보이는 할아버지.
정말 그랬다. 손녀, 손자들 향한 사랑이 각별하셨다.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묵묵한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군에 간 막둥이손자의 첫 면회 길에서 춥지 않냐 물으시고 고이는 눈물을 들킬세라 하늘바라기만 하셨다.
깊은 산골짝 밭일 가셨거나, 꼴짐지고 내려오는 지게에 흔들거리며 얹혀오던 산열매들.
머루, 산딸기, 다래가 지게 바소쿠리 꼭대기에 장식으로 매달려오더니, 지금은 살구를 매달아 놓으셨구나. 손자, 손녀 또 낳고 낳을 줄줄이 후손들까지 따 먹으라고 달아놓으신 열매들이다.
갑작스레 쓰러져 읍내병원에 입원하셨던 어느 해 봄날. 먼 바닷가에서 소금기를 털며 달려온 손녀의 얼굴을 희미한 의식으로 알아보셨다. 나는 아직도 그 첫마디를 잊지 못한다. 남편이 버젓이 옆에 있었건만 천천히 물으셨다. 네 신랑 벌이는 잘하는 겨?
못살고 굶주렸던 당신의 세대를 기억하시는가. 밥벌이 잘해 처자식 배곯게 안하느냐는 물음 속에 손녀사랑이 절절하게 묻어나왔다.
바다는 어찌 나와 친정사이에 버티고 드러누웠는지. 자손들 중 유일하게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게 했다. 겨우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손녀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이다 가셨단다. 핏대를 세우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 소리쳤건만 마지막순간 나를 외면하신 할아버지.
해마다 주렁주렁 열리는 과일나무들만 남겨두고 가셨다.
소강상태인 장마기운 사이로 호수에서 방금 건져 올린 바람이 숨어든다.
덩달아 살구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2005년 6월 29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