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밭에서
“다 빼먹었구먼......,쯧쯧”
앞선 걸음의 어머니는 밭 고랑사이를 걸으시며 연실 그 말만 하십니다.
나물바구니를 들고 뒤따르던 맏며느리는 뭘 먹었다는 것인지 의아해집니다.
아침도 거르고 왔건만, 자꾸 뭘 빼먹었다고 하시는 어머니.
둔덕 아래로 할아버지의 묘지 앞에 나무를 심는 아버님과 아들들이 보입니다.
덩달아 우리 딸과 아들도 검불에 불을 놓으며 강아지마냥 뛰어놉니다.
너무 멀리 있는 무리들은 뭔가 빼먹은 범인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의심하기에는 시조부모님 산소가 밭과 꽤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밭을 옮겨가시며 같은 말만 반복하시는걸 보니,
아마도 나물들을 누군가 모조리 뜯어갔나 봅니다.
하긴, 군데군데 잡풀 몇 포기 외에는 먹을 만한 봄나물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어머니의 혼잣말에 드디어 답을 찾았지요.
“아니, 거름도 줘가면서 밭을 일궈먹어야지 어쩜 이렇게 쏙쏙 빼먹기만 했냐.”
한숨 섞인 말씀 속에는 안타까움도 잔뜩 묻어나옵니다.
비록지금은 남의 소유가 되었을지라도 도시로 떠나기 전까지 애면글면 가꾸신 농토입니다.
봄의 너른 공간에 쓸쓸히 퍼지는 어머니 표정을 읽습니다.
“잡초 없애려고 농약만 쳐댔으니 이 꼴이 된 게야.”
이젠 아예 나물생각은 잊으신 모양입니다.
깊은 주름마다 숨어있을 지난 세월에는,
새댁인 어머니도 있고 내 남편의 유년도 힘차게 들판을 뛰어다닙니다.
산천초목 변하지 않았노라 부여잡고 싶으셨을 겁니다.
사람들만 욕심으로 얼룩지고 속내가득 미움의 싹을 키워가는 것이라 믿으셨을 텐데.
흙마저 병들어있으니 못내 허전함을 감추지 못하십니다.
나물은커녕 파릇한 잡초들조차 자라지 못하도록 삭막해진 밭에서는,
반나절 내내 흙먼지만 봄바람에 풀풀댑니다.
“나물 없으니 꽃다지라도 캐가자.”
밭에서 건질 것이 없으니, 비탈진 논둑에 간신이 붙어있는 싹들을 거두자하십니다.
호미 댈 것도 없이 술렁술렁 빠지는 꽃다지들을 담았습니다.
남자들 묘지 가꾸는 동안 나물바구니가득 봄 냄새 담아가고픈 어머니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꽃다지를 뽑는데 괜히 시무룩해집니다.
절대로 농부한테 시집보내지 않을 거라는 친정 부모님 덕분에 씨앗모양새도 모르며 자란 며느리한테도 흙의 소리가 들립니다.
오랜 지병에 골골 앓습니다.
빨대를 들이대고 양분만 쪽쪽 빨아먹어서인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쩐지 흡수력 가장 센 빨대가 제 입에 물려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기름진 땅으로 제대로 가꾸며 이어가지 못한 것은 바로 우리세대의 책임이니까요.
돌아오는 길.
비어있는 비닐하우스 땅바닥에서 그나마 몇 무더기 냉이와 만났습니다.
아침나절 한숨의 어머니가 낮게 웃으십니다.
곁에 쪼그려 앉는 저의 손아귀에서 호미가 힘차게 나물낚시를 시작합니다.
질식해가는 흙의 숨통이 쪼매라도 트였으면!
2005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