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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지게, 물지게


BY 박예천 2008-12-22

 

                    꼴지게, 물지게

 


 

할아버지 지고 가는 나무지게에

활짝 핀 진달래가 꽂혔습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노랑나비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따라갑니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팔딱팔딱 고무줄놀이를 하며 즐겨 불렀던 노래이다. 나무를 한 짐 해 오시는 할아버지 지게에 분홍빛 진달래와 노랑나비까지 덩달아 따라왔다는 곱디고운 노랫말이다. 낡은 모시잠방이 아래로 진흙 묻고 핏줄 도드라진 내 할아버지의 두 다리가 보인다. 도돌이표 붙여 여러 번 겹쳐 불러도 똑 같은 모습의 할아버지가 복사된다. 나뭇짐, 꼴 짐, 밭갈이 마친 쟁기까지 올라타는 지게였다. 어쩌다 진달래무리가 꽂힌 적이 있었는지는 가물가물 아득하다. 뿌옇게 멀어진 기억 속에서 산딸기가 톡톡 터진다. 산 하나가 붉게 농축되어 여물었는지 지게 끝에 매달려 왔었다. 머루, 다래, 밤송이까지 산열매는 계속 이어졌다. 짐을 부리거나 여민 후 내려오는 길 어디쯤에서 산열매는 샐쭉하니 웃는 손녀딸의 웃음이었을 거다. 첩첩산중 고향들녘에 지게 지던 할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다. 가끔 매달려 오던 산열매도 끊어졌다.

 

추억의 곁가지는 갈수록 질겨져 틈만 나면 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특별한 사연이 있는 한 부분 만이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잠이 들면 꿈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깨어있는 한낮에도 온갖 물건들 속에 할아버지가 계시다. 목욕을 할 때면 끈적이는 땀을 씻어드리며 보았던 길쭉한 할아버지 등이 수돗가에 가득하다. 허리뼈 아래 밤색 반점까지 보인다.

“ㅇㅇ야, 물 좀 끼얹어 다오” 꼴지게를 내려놓고 뒤란 우물가에 가면 나를 찾으셨다. 지게 멜빵 자국이 남아있는 어깨에서 등줄기 따라 꼼꼼하게 때를 밀어드렸다. 손 시린 펌프 우물물로 닦아드리면 오스스한 냉기에 ‘어이구 시원타!’를 연발 하셨다. 

 

할아버지는 무엇이든 잘 만드셨다. 특히 싸리나무를 잔뜩 베어 오셔서 삼태기와 광주리도 만드셨고, 바구니와 마당비를 비롯하여 자잘한 도구들을 매끄러운 솜씨로 꼬아내셨다. 싸리나무로 만든 것 중 바소쿠리는 그중 큰 물건에 속한다. 지게 위에 얹어 거름이나 꼴을 실어 나르는 거대한 바구니역할이었다. 지게도 역시 손수 만드셨다. 나무를 깎고 짚으로 새끼줄을 걸어 멜빵을 만든다. 짚을 도톰하게 하여 등태를 달아 짐의 무게로 눌리는 충격을 덜게 한다.

지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순하게 지어진 운반도구 같으나 과학적인 이치와 맞물려있다. 우선 두 다리와 뒤쪽의 가지가 균형 있는 삼각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사용하는 사람의 키나 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조절하여 만들기도 한다. 쉽게 생각하여 아무렇게나 만든 물건 같으나 인체구조와 일감에 맞게 만들어졌다. 조상들의 지혜로움이 배어 나오는 기구이다.

 

여름 긴긴 해가 숨을 접는 시간에 먼 들녘으로 나가면 움직이는 풀 더미가 시야에 들어온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꼴지게만 넘실대며 둑을 넘는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작대기를 팔짱 안에 사선으로 잡은 할아버지가 걸어오신다. 아니 지게와 춤을 추는 것은 아닐까. 몸을 곧추세우면 등에 지고 있는 꼴짐이 위태로우니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걷는다. 할아버지와 지게는 한 벌 옷이었다. 등에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게를 걸쳐 입었다고 해야 맞다. 논일 밭일 갈 때 그렇게 지게는 할아버지 몸에 붙어 다녔다. 산비탈 아래 우마차가 들어갈 수 없는 길은 일일이 등짐을 지고 가야한다. 거친 자갈밭이기도 했겠지만 실은 수레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가난 때문이었다. 줄줄이 딸린 가족들이 지게 위에 가득 올라앉아 할아버지 짐은 더욱 어깨살에 박혔으리라.

 

들과 산에서 할아버지가 나무지게를 지고 있는 동안 집안에 또 하나의 지게가 어머니 등에 업혀 다녔다. 바로 물지게이다. 분명 이름은 물지게인데 어머니는 샘에서 물을 길어오지 않는다. 맑은 물대신 늘 구정물을 뒤뚱거리며 지고 다니셨다. 소 돼지 많이 키우던 그 시절은 음식물 쓰레기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쌀을 씻고 난 뜨물까지 알뜰하게 모았지만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언덕너머 외딴집과 교장선생님 댁에도 오촌당숙 집에도 커다란 구정물 통을 가져다 놓고 음식찌꺼기와 뜨물을 걷어왔다. 학교에서 오는 길이거나 지나가던 친구들 앞에서 어머니를 마주치면 어느 책 속의 주인공처럼 수치심이 화끈거리며 밀려왔다. 찌꺼기 담은 물지게를 지고 가는 어머니를 구정물 인생으로 보았던 걸까. 그 순간 양심이 시큰하게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는 나에게서 진동했는지도 모른다.

무쇠 솥에 저녁밥을 지어 뜸을 들인 후, 어머니는 곧바로 텅텅거리는 양철통을 흔들며 물지게를 어깨에 올렸다. 걸어가는 어머니를 뒤에서 지켜보니 십자가를 지고 가는 형상이다. 출렁이는 것이 넘치기라도 할까 조심해서 걸어야하고 양팔을 나무 대에 가로로 걸치고 가야한다. 손을 내리기라도 하면 중심을 잡기 힘들고 내용물이 모두 쏟아지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있어 구정물 나들이가 잠시의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라는 것을 뒤늦게 나이 먹어 알았다. 층층시하 고된 시집살이에 특별한 외출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물지게를 지고 나갔던 며느리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면 호통을 치던 할머니 목소리가 기억난다. 밥 차릴 생각도 않고 마냥 긴 시간을 밖에서 보낸다고 했다. 한복 선이 곱던 여린 어깨로 어쩌면 어머니는 일부러 구정물지게 지는 일을 자청하셨는지도 모른다. 당당하게 허락 받은 혼자만의 외출이었다. 언덕너머 집 아낙과 깔깔 소리 내어 웃기도하고 교장선생님 댁 사모님은 맛난 음식까지 챙겨주신다. 대접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분명 머리 조아리며 수줍어했을 거다.

나는 지금껏 어머니의 물지게를 단 한 번도 등에 진 적 없으면서 삶에 지쳐 어깨가 짓눌린다고 자주 엄살을 부린다. 달랑 검불 몇 개 짊어지고 걷는 설익은 인생주제에 말이다.

 

올해 예순 하나 된 어머니는 아직도 지게를 벗지 못하고 사신다. 소 돼지 팔아 먹일 가축도 없고 구정물 받아 놓는 집들도 사라졌건만 얼기설기 핏줄로 엮어진 등태를 붙인 가족의 짐을 지고 있다. 물지게로 퍼 나르던 양철통 위에 자식들까지 다닥다닥 올라앉아 근심을 더해드리고 있다. ‘짐을 지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이름이 지게인가.  

깊어 가는 가을밤, 송강 정철의 시조가 애달프게 그려진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 커든 짐을 조차지실까


어머니, 이제 짐 벗어 나를 주오.......,이 딸에게 주오.


 

 

 


2004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