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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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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넘이


BY 박예천 2008-12-22

 

                        해넘이

 


 

그 유명한 동해바다의 귀한 해가 날마다 곁에서 떠오르고 넘어간다. 밤사이 소금기에 잘 절여진 붉은 해는 수평선 위를 박차고 오르면서 보는 이들에게 공평한 하루를 던져놓는다. 앞집 순이와 뒷마을 개똥이네 집에도 부족함 없이 골고루 따습고 환한 빛이다.


사람들은 일출을 건지러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고 해 앞으로 모여든다. 그렇기에 신년벽두 떠오르는 해의 목에는 주렁주렁 넘치는 소망들이 걸리게 된다.

해돋이가 아름다운 이곳 속초에 살게 된지 어느덧 여섯 해. 허나 해가 뜨는 모양을 제대로 본적이 없다. 늦잠을 자는 게으른 생활습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에겐 해넘이가 더 벅차게 간직되어 있다.


남편 발령에 맞추어 좀 무리가 되었지만 덜컥 집을 샀다.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주인과 부딪히지 않아 좋고, 더는 이삿짐 싸는 수고를 마감할 수 있겠다는 단순한 결정이었다. 사실 집의 방향이라든지 채광을 고려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다.

한 학기가 끝날 무렵, 남편이 속초에 있는 고등학교로 옮기게 되어 급하게 집을 얻어야했다. 집을 구하는데 단 하루가 걸렸다. 구월부터 시작되는 2학기 첫 출근을 위해, 우리 가족 네 식구는 그렇게 팔월 말일 속초에 뿌리를 내렸다. 처음 몇 날은 바닷가로 멋진 여행을 온 듯한 기분에 들떠 잠이 오지 않았다. 남들은 벼르고 맘먹어 올 수 있는 바로 그 곳에 나의 집이 생길 줄이야.


우리아파트의 복도 창 쪽으로는 동해바다가 출렁거리고, 앞 베란다에서는 장엄하게 펼쳐진 설악산 울산바위를 언제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출에만 의미를 둔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서향에 위치한 우리 집 구조는 인기가 없어 집을 보러온 이들이 왔다가도 다시 연락을 주지 않는다. 서해바다 앞에 살았다면 상황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담이 낮고 마당 넓은 한옥으로 이사 가고 싶은 남편의 계획이 자꾸만 무산되고 있다. 해돋이와 해넘이까지 전부 우리 집 마당 안으로 초대 할 집을 꿈꾸었지만 사람일이 어디 뜻대로 되는가.


새벽에 뜬 해는 아파트 전체를 달구다가 정오를 시작으로 저녁 무렵까지 슬슬 우리 집 안을 기웃거리며 들어온다.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으며 가구들과 혹은 널어 넣은 빨래들 앞에 제 몸을 반사시킨다. 어쩌다 나와 눈이 맞으면 내내 방바닥에 눌러앉을 적도 있다.

거실에 가득해지는 오후의 햇살은 꼭 지금의 내 인생나이를 닮아있다. 철모르는 어린아이 일출을 경험하고, 두볼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던 사춘기아침해의 열기도 겪었다. 뜻을 세운다는 청년의 오전 햇살로도 힘차게 걸어보았다. 조금은 지친다싶을 정오의 해 위치에 서있던 나이가 나를 비껴갔다. 불혹이 가까워지니 집안으로 들어오는 늦은 해의 방문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해는 적당히 길어진 그림자까지 군식구로 달고 온다. 세월이 흐를수록 오래 묵은 친구들이 많아진 나와 흡사하다.

또래의 벗을 찾듯 늘 같은 시간 손등을 간지럽게 하며 아는 척하는 해가 반갑다. 나이가 더해가면서 지나온 추억들을 아름답게 회상하는 요즘의 나에게, 해는 혈기왕성 젊었던 눈으로 오전 내내 구경한 세상을 이야기 해준다.

집집마다 찾아들어 젖은 빨래를 건드렸고 눈에 밟히는 꽃들에게는 양분을 주어 땅을 걸게 했노라 소곤거린다. 그러고도 남은 온기와 빛이 있어, 나에게 깃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둘 다 나른해지는 오후 나는 가끔 그에게 기대어 편하게 졸기도 한다. 문득 낮잠에서 깨어 울산바위 쪽을 보노라면 아직도 한 뼘 족히 남은 해의 주름이 하늘과 맞닿아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대충 하루의 때를 짐작하게 된다. 된장국에 넣을 푸성귀를 슬슬 다듬어야 할 시간인지 저녁쌀을 씻어 안쳐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대충 집안일을 끝내고 해질 무렵 들려야하는 곳은 빨랫감이 널려있는 베란다이다. 툭툭 마른빨래에 먼지를 창문 밖으로 흔들어대며 온종일 내 몸에 붙어있던 피곤의 비듬도 털어 낸다. 잠깐 고개 들면, 설악산 울산바위를 넘어가며 눈인사를 보내오는 해넘이.


시작만큼 중요한 것이 마무리이다. 하루를 잘 살아낸 것에 감사하며, 새로 올 아침을 기대하게 된다. 종일 열병을 앓던 아이를 안고 해넘이 앞에서 하는 기도의 말은 ‘내일은.....’이다.

해는 새벽에 태어나 주어진 하루를 살다가 해넘이로 사라진다. 이렇듯 날마다 뜨고 기울며 반복되는 자연현상 앞에서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내 남은 인생도 제대로 살아 해를 넘겨야겠다고.

                        

                                                2004년 초겨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