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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이비인후과에서


BY 박예천 2008-12-22

       이비인후과에서

 

 

 

 

티브이방송 오락프로그램이었던가. 진행자가 한 여배우를 향해 묻는다.

“첫사랑은 언제 해보셨나요?”

조금 머뭇거리는가싶더니 부끄럽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야말로 사연 깊은 첫사랑이 소개 되려나 기대했던 나는 금세 실망하고 만다.

유치원 때 단짝 했던 남자아이거나, 초등학교시절 담임교사였다는 거다.

물론 그것을 굳이 사랑이라 이름 짓고 싶었다면 할말은 없다.

허나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세월의 이끼가 잔뜩 끼어도 선명한 색으로 빛을 발하는 것이 첫사랑이라고.

마이크를 들이대고 방송진행자가 갑자기 나를 향해 묻는다면,

꽃다운 이십대 초반에 첫사랑을 경험했노라 답할 거다.


지나보니 첫사랑은 이러하더라.

마음속에 ‘그’는 항상 살아있으며, ‘그’가 한 말들은 퇴색되지도 않는다.

함께 걷던 거리나 주고받았던 미소들이 향기를 잃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있다.

함박눈이 도시전체를 슬금슬금 덮어가던 밤.

내리는 눈발사이 우뚝 선 가로등 불빛아래 그가 있다.

“널, 사랑해. 영원히 그럴 거야. 내가 한 말에 책임지는 남자가 될 거야.”

나의 ‘그’는 약속의 말처럼 열과 성을 다해주었다.


아픔과 고통도 없이 끝까지 아름답게만 장식되어줄 사랑이라 여겼다.

자연스레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라는 순리대로 진행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남자보다 한살 연상인 것이 걸림이 될 정도로 양가 어른들은 고지식했다.

지금생각하면 너무나도 어이없는 반대이유에 부딪혀 결국 아픈 이별을 하게 되었다.

사랑이 아픔도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배웠다.

남자도 눈물을 하염없이 흘릴 수 있다는 것 또한 헤어지는 순간 알았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거짓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의 깊이는 거침없이 나를 흔들어댔다.

계절마다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으로 마음은 달음박질쳤다.

간간이 나의 ‘그’가 잘 살아있다고 지인을 통해 전해 들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어느덧 십 육년의 시간이 흘러갔구나.


작년연말, 편도염으로 일주일째 고생하며 이비인후과엘 다녔다.

단골환자인지라 간호사들과 눈인사도 교환하고 농을 걸 정도로 친해졌다.

대기실에 앉아 철지난 잡지를 뒤적이는데, 귓가에 오래전 익숙한 음성이 들린다.

시선은 잡지 속에 고정시킨 채 한참이나 기억 속 갈피들을 넘겨댔다.

아! 맞다. 나의 ‘그’가 흘리던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였구나.

흘깃 곁눈질로 쳐다보니 아내인 듯한 여자와 정담을 나누고 있다.

남매인지 두 아이가 번갈아 ‘엄마, 아빠’를 외치면 대꾸도 해준다.

정면으로 볼 수 없는 위치이니 과연 나의 ‘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친김에 뒤통수라도 실컷 봐두자.

흰머리가 꽤 많은 중년남자다. 살이 쪄서 그런지 목이 더욱 짧아보였다.


간호사의 부름에 따라 계집아이하나가 달려가니, 남자 옆에 아내인 듯한 여자가 아이 손을 잡고 들어간다.

뚫어져라 다시 옆모습을 보니 정말 나의 ‘그’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만날 수 없었고, 단 한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었던.

내 모습을 훑어보니 가관이다.

화장기는 전혀 없을뿐더러 자루 같은 옷차림에 살찐 중년여인이다.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여기는 순간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먼저 들어간 모녀는 진찰실 대기의자에 앉아있고 내가먼저 치료를 받는다.

하마 입을 벌리니 의사는 갖가지 약품을 목안에 뿜는다.

웩웩 구역질을 하고 눈물이 맺히며 힘들어하니 앞자리에 모녀가 쳐다보며 웃는다.

도저히 저 여자는 자기 남편의 첫사랑은 아니라는 확신에 찬 미소다.


주사실로 안내된 후, 약솜으로 엉덩이를 문지르고도 한참이나 나올 수가 없었다.

문틈으로 그의 가족들이 나가주기를 기다렸다.

치료비계산을 끝내고 병원 나서는 것 확인하고서야 엉거주춤 주사실에서 나왔다.

“간호사언니, 방금 그 여자아이 부모이름 알 수 있나요?”

참으로 엉뚱한 아줌마라는 듯 쳐다보며 이름 석자를 불러준다.

가슴절절하게 꿈에서도 그리웠던 나의 ‘그’가 아닌가.

가족여행 왔다가 아마도 딸아이의 감기로 치료를 받은 모양이다.


약국에서 약봉지를 받아들고 황량한 겨울거리로 나오니,

중년된 그 남자만큼이나 나이 먹은 내가 보인다.

어찌하여 나는 그가 나이먹지 않을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해온 걸까.

주사기운으로 뻐근해진 엉덩이만 탓하며 비실비실 웃고 걸었다.

2004년이 저물던 그해겨울.

그렇게 나는 오래 간직했던 첫사랑을 접었다.

이별 후 열여섯 해 만의 만남이 이비인후과에서 끝났다.

 

2005년 1월 21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