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 꼭대기에
어릴 적 유뽕이가 두 돌 막 넘겼을 무렵.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지요.
처음엔 귀가 들리지 않는가보다 생각되어 청력검사부터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녀석이 말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장애가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지요.
컵 가져오라는 말에 수저를 내밀고, 커튼 닫으라고 하면 창문을 열어놓는 식이었지요.
상황이 그렇다보니 재미있는 동화이거나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고 웃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열네 살 유뽕이는 이제 엄마랑 장난스런 말에 까르르 웃기도 할 정도로 컸답니다.
잠자리 들기 전, 둘이 침대에 누워 동요 노랫말을 바꿔 부르며 놀았답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철부지 엄마가 유뽕이를 놀려대기 시작하지요.
엄마어릴 적 곧잘 얄미운 친구들을 향해 지어 부르던 노래였답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유뽕이 팬티가 걸려있네......,”
예전엔 이쯤 되면 소리치며 가사 정확히 불러야한다고 난리였는데, 녀석이 달라졌습니다.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벌써 키득거리느라 어깨가 들썩이네요.
엄마가 다음 소절을 마저 부릅니다.
“견우가 (우리 집 강아지이름) 올라가서 냄새만 맡고 내려오지요!”
기껏 끙끙대고 높다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는 겨우 팬티냄새를 킁킁대다 내려온다는 말뜻을 알고나 웃는 걸까요.
숨이 넘어갈 정도로 꺽꺽 거리며 유뽕이가 웃음을 참지 못합니다.
이제는 유뽕이가 엄마노래를 중간에서 낚아채버립니다.
녀석이 먼저 미루나무 꼭대기에 자기 빤스가 걸려있다고 앞 소절을 만들어 부르네요.
일부러 엄마는 가만히 있어봅니다.
나머지 부분을 자기 식으로 장난 노랫말로 꾸미더군요.
“ㅇㅇ선생님이 올라가서 유뽕이 방귀냄새 맡지요!”
평소 무섭거나 맘에 들지 않는 선생님을 노래가사 속으로 옮겨다 놓았던 것인지,
데굴데굴 구르며 웃느라 난리가 났습니다.
엄마는 노래내용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습니다.
아들의 통쾌한 웃음소리에만 절로 흥이 납니다.
자꾸만 노래가사를 유뽕이 관심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로 엮어가며 불러줬습니다.
“ㅇㅇ의사선생님이 올라가서 팬티에 주사 놓고 내려오지요!”
유뽕이는 기침까지 연거푸 해대며 까르륵 거리느라 엄마 입을 막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땀 뻘뻘 힘들게 올라가서 팬티에 주사 놓고 내려온다니 우습긴 합니다.
엄마는 참 궁금해졌지요.
녀석의 머릿속에 장면이 상상되는 걸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지 ‘팬티’라는 말에 자동적으로 웃음이 나올리는 없으니까요.
여태 유뽕이가 어떠한 이야기 의미를 이해하며 배꼽잡고 웃는 걸 본 적이 없답니다.
단지 미루나무 꼭대기에 아들의 팬티를 걸어 놓았다는 이야기일 뿐인데,
유뽕이는 너무나 해맑고 힘차게 웃음을 흘립니다.
밤은 깊어만 가는데 잠도 잊은 듯 온 방안 가득 깨알 웃음소리를 뿌리네요.
엄마는 더 오랫동안 아들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져 잠도 미룬 채 노랫말 엮어가는 저속한 수준만 높이고 있었지요.
이제 점점 엄마가 제정신을 놓고 있습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할아버지 팬티가 걸려있네. 할머니가 올라가서 냄새를 맡고 내려오지요!”
원주사시는 유뽕이 할아버지, 할머니, 교회목사님, 권사님, 외삼촌과 외숙모까지 동원되어 팬티를 미루나무에 걸어두고 있습니다.
아! 정말 큰일 났습니다.
이러다간 엄마에게 법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어 경찰서로 넘겨질 위기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온갖 친인척 지인들 동원해서 미루나무 꼭대기로 팬티 걸어두러 올라가는 몰지각한 사람들을 만들고 있으니까요.
등장인물들의 폭이 옆집 이모에까지 넓어지자 유뽕이가 숨을 고르기 시작합니다.
진정국면에 이른 것입니다.
매트리스가 들썩이도록 어찌나 웃어댔는지 머리에 땀방울이 맺혔네요.
비록 웃음요인의 시작은 엉뚱한 것이었으나, 유뽕이 생각 폭이 넓어진 것을 확인한 듯 엄마는 힘이 납니다.
무의미하게 혼자 중얼대다 히죽거리며 웃는 녀석을 보는 일은, 참으로 가슴 저미는 순간이었으니까요.
이유 있는 반응, 의미 담긴 언어를 아들과 주고받고 싶습니다.
오늘 밤은 미루나무 꼭대기에 냄새나는 유뽕이 팬티만 걸어두고 내려왔습니다.
녀석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각없는 행동의 주범으로 만들었고요.
장애가 확인되던 지난 십년 전부터 지금껏 엄마는, 꼭 한 가지 꿈만 가슴에 품고 미루나무를 찾아다녔지요.
몸 나이가 커진 만큼 생각의 크기도 쑥쑥 나무만큼 높아지는 날.
녀석의 팬티가 아닌 아주 근사한 것을 들고 나무타기로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높다란 꼭대기에 오르게 되는 날.
아들과 세상을 넓게 아우르며 오늘 밤보다 더 벅차고 찰진 웃음을 흘릴 겁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웃음을.
2012년 10월 20일 아빠생일
유뽕이 이야기 백 번째 쓰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