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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뽕이 시리즈 94 - 영랑이 동생 영우


BY 박예천 2012-10-06

 

             영랑이 동생 영우





            (가을로 접어들 무렵, 울 예쁜 영랑이 모습입니다ㅠㅠ)

 

추석명절 이틀 전에 영랑이가 죽었습니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귀와 목 주변에 핏자국이 선명한 채로 하루 종일 앓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했지요.

아파트에 살다가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면서 아는 분께 얻은 얼룩무늬 토끼입니다.

삼년 내내 가족처럼 애지중지 살피며 키웠지요.

지난봄에는, 갇혀 지내는 것이 불쌍하다고 아빠와 엄마는 나무기둥 세워 철망을 넓게 두른 영랑이 새집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당 한 쪽에 영랑토끼네 집이 근사했었지요.

시간만 나면 엄마는 영랑이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앉은뱅이 의자에 쪼그려 앉아 꽤 많은 수다를 떨곤 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유뽕이도 동생 영랑이를 챙기느라 집안 구석구석 솟아난 풀들을 뜯어 먹였습니다.

아빠가 정성들여 심어놓은 근대 싹도 잘라주고, 참나물도 마구 뜯어다 주었답니다.


여름동안 마당 안 가득 넘쳐나던 채소들을 거둬들이자, 아빠는 영랑이를 마음껏 뛰어놀라며 마당에 풀어주셨습니다.

햇살이 뜨거운 낮엔 미나리 밭 옆에서 졸거나 엄나무그늘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곤 했지요.

애완토끼가 아니었는데도, 영랑이는 영리한 토끼였어요.

아빠가 퇴근하는 시간 대문이 열리면 쪼르르 달려가 머리를 내밀었지요.

아침마다 젖은 빨래꾸러미를 들고 마당으로 나서면, 엄마 곁을 뱅글뱅글 돌며 쓰다듬어 주기를 기다렸던 귀염둥이였습니다. 해질녘 빨랫감을 걷으러 나가는 엄마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귀신같이 달려오던 녀석이었습니다.

마당가에 앉아있노라면 다가와 맨살 종아리를 간지럽게 핥아서 엄마가 많이 웃기도 했지요.


며칠사이 동네 길고양이들이 드나들더니 밤중에 거대한 싸움이 일어났나봅니다.

뒤꼍 나무더미 틈에 숨어 할딱이며 숨 고르는 영랑이를 아빠가 건져냈지요.

다시 살아날까 정성껏 보살폈는데도, 하루 만에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토끼가 눈물 흘리는 것을 처음 보았어요. 휴지로 닦아줘도 얼마나 아팠으면 다시 촉촉이 눈가가 젖어왔을까요. 마지막으로 죽어가며 굳어있던 영랑이 몸이 기억납니다.

떠 있던 눈가에 맺힌 이슬이 보였습니다.

영랑이를 우물가 감나무 밑에 묻었습니다. 유뽕이에게 죽음을 설명해 주었지요.

올해 6월 외증조 할머니 장례식 과정을 직접 봤기에 이해가 쉬웠을 겁니다.

유뽕이는 자꾸 말했습니다.

“엄마, 영랑이 병원 가서 치료해야겠다!”

죽은 영랑이도 병원가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 믿었던 것이지요.


그 날 이후, 엄마는 마당에 나가기가 싫어졌습니다.

곳곳에 영랑이의 흔적이 있네요.

뜯어먹다 남긴 푸성귀들마다 입 자국이 있고, 패랭이꽃 옆 흙더미에도 영랑이 몸 크기만큼 움푹 패어있습니다. 어디선가 예전처럼 툭 튀어 나올 것만 같아서 눈물바람만 하게 됩니다.

나이 먹은 엄마는 부끄러운 생각에 눈물을 참아보지만, 저절로 흐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답니다.

모종삽을 들고 온 아빠가 영랑이가 놀던 몸 자리를 흙으로 평평하게 만듭니다.

아빠도 가슴이 짠하다고 말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옥상에 좋아하던 상추나 실컷 먹게 할 걸 그랬다고 죽은 영랑이에게 미안해합니다.

유뽕이도 허전했는지, 엄마에게 조릅니다.

“엄마, 아빠한테 말해서 토끼 사오라고 해야겠다!”

슬픔을 모르는지 그저 녀석에겐 새로운 토끼만 오면 해결 되는가 봅니다.


우연히 토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선뽕이누나 친구가 자기 집 두 마리 중 하나를 데려다 키우라고 말했답니다.

영랑이를 빨리 잊으려면 새로운 토끼에게 정을 들여야 한다며 아빠가 선뜻 나섰지요.

엄마는 솔직히 내키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도 다시 키우며 정들이기가 싫어졌지요. 영랑이에게 미안한 맘도 들었고요.

 

 


            (영랑이 살던 옛집에 동생 영우가 살게 되었답니다^^)

 

드디어 누나친구네 토끼가 유뽕이네 집에 왔습니다.

잿빛에 탐스러운 귀가 늘어지고 눈망울이 초롱초롱 예쁘더군요.

이름을 뭐라 지을까 가족들이 여러 가지 내 놓으며 고민합니다.

엄마가 한마디로 정해버렸지요.

“영랑이를 잊지 말자는 의미로 앞 자는 ‘영’으로 하고, 끝 자는 너희 남매랑 강아지 견우가 ‘우’니까 돌림자 따서 ‘영우(永友)라고 하자. 영원한 친구. 어때?”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습니다.

오래오래 우리가족 곁에 있어달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새 식구 영우가 생겼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유뽕이는 영우를 동생이라 하지 않고 자꾸 ‘영우 삼촌’이라고 부릅니다.

어디서 비슷한 이름을 보았을 겁니다.

엄마는 고구마나 과일처럼 단 것을 잘 먹던 영랑이와는 다르게, 민들레와 씀바귀만 좋아하는 영우에게 풀을 뜯어주며 또 다시 수다 떨지요.

“야, 임마! 영랑이 형아는 뭐든지 잘 먹었어 짜식아! 주는 대로 먹지 편식을 하냐. 뭐라고? 비교하지 말고 키우라고?”

잠시 젖어들던 슬픔을 영우의 등장으로 가려보려는 엄마의 수다에 지켜보던 가족이 웃습니다.


유뽕이 스쿨버스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오네요.

엄마는 주섬주섬 손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나섭니다.

버스에서 내린 아들의 팔짱을 끼고 걷다가도 길옆에 싱싱한 씀바귀를 보자 반색하며 뜯지요.

“우와! 유뽕아! 여기 우리 영우 먹을 게 참 많다 그치? 집에 가서 유뽕이가 영우 먹으라고 줘 알았지?”

집을 향해 오다가 곁눈질로 영우의 먹을거리를 찾습니다.

한줌씩 뜯어 모은 씀바귀가 한 아름이 되었기에 헐렁한 유뽕이 가방에 넣어주며 메고 가라 했습니다.


보폭이 넓어지고 키도 듬직하게 큰 아들 곁에 대롱거리며 따라 걷던 엄마는 어느새 멀리 떠난 영랑이는 뒷전이고 영우만 챙기네요.

감나무 아래 잠든 영랑이가 섭섭해서 또 울어버릴까 걱정입니다.



2012년 10월 3일

새 가족 영우가 오던 날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