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바다 예술제
유뽕이네 학교에서 삼년 만에 예술제를 하는 날입니다.
오후 2시부터 시작이라는데, 점심때가 다되어도 엄마는 꼼짝하기가 싫습니다.
벌써 지난달 안내문에 집에서 틈틈이 연습을 시키라고 했지요. 파랑새반 친구들은 수화로 노래를 한답니다.
아무리 비유 맞추며 녀석에게 노래를 가르쳐 봐도 꿈쩍도 안했습니다.
날짜는 다가오는데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검정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는다기에 챙겨 입히면서도 힘이 나질 않습니다.
솔직히 결석이라도 하고 싶은 엄마의 심정입니다.
보나마나 무대 위에서 딴 짓을 하거나 엉뚱한 표정 짓고 서 있을까 싶어서였지요.
진땀 흘리다 도망치듯 아들 손을 잡고 나와야 하는 상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간단히 세수하고 화장을 했지요. 곱게 차려입지도 않았습니다.
사진기도 꽃다발도 준비하지 않고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선뽕이 누나와 예술제가 열리는 유뽕이네 학교로 향했습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꽃다발과 사탕부케를 늘어놓고 파는 아줌마가 보입니다.
저런 것 다 소용없다며 터덜터덜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지요.
교육청관계자와 귀한 내빈여러분의 맨 앞자리 다음인 두 번째 줄에 앉았습니다.
참가자 명단을 보니‘전유뽕 외 11명’이라 써있습니다.
선생님의 동정심어린 배려일 뿐이라고 생각되었지요.
제대로 못하는 녀석이니 이름이라도 인쇄하여 엄마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자는 의도였다고 비뚤어진 맘으로 여겼습니다.
대충 시간만 채우고 자리에서 빠져나가자 속마음을 먹었지요.
세 번째 순서, 드디어 파랑새반 친구들이 나옵니다.
심장이 멎어버릴 듯 얼굴이 후끈거려 고개를 잠깐 숙였다 들어보려는데 앞줄 맨 왼쪽에 유뽕이가 보입니다.
여자친구 손잡고 걸어와 의젓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습니다.
전주 시작되는가 싶더니 녀석은 무릎 사뿐히 접었다 펴며 준비무용을 합니다.
아! 수화로 엮어지는 노래가 시작됩니다.
표정도 한껏 웃으며 행복한 모습으로 유뽕이가 수화를 합니다.
홀라당 말라버려 핏발만 서곤 하던 엄마의 눈에 자꾸 뜨끈한 것이 볼을 타고 내려옵니다.
분명 입가는 함지박마냥 웃고 있는데 주책없이 흐릅니다.
손으로 닦아내도 눈물샘이 고장 났는지 정신없이 샙니다. 나중엔 헉헉 거리기까지 하였지요. 진정하려해도 어쩌면 좋을까요. 어깨가 들썩여지고 앙다문 입술이 실룩거립니다.
옆에 선뽕이 누나도 있고, 바로 앞에 교육청 아저씨들로 가득한데 무슨 망신스런 모습인지요.
곁눈질로 보니 별명이 냉혈인간, 얼음공주인 선뽕이 누나도 눈이 벌겋습니다.
엄마의 귓속에 손을 포개고 흐느끼는 사이 작게 속삭입니다.
“엄마! 우리 유뽕이가 언제 저렇게 컸지?”
유뽕이가 제일 잘합니다. 순서도 잘 외웠고 손모양이나 표정이 살아있습니다. 슬쩍 옆에 친구를 따라 하기도 합니다.
돋보이는 녀석에게 환한 빛 한 무리가 쏟아지는 듯 보입니다.
가방에서 손수건 꺼내 눈가에 묻은 물기를 찍어냅니다.
이대로 울고만 있을 수 없지요. 객석에 앉아 엄마가 수화를 합니다.
예전 스물 몇 살 때 배운 수화자격증을 떠올리며 그날의 엄마가 되어 유뽕이가 쳐다보라고 커다랗게 손가락동작으로 허공에 그립니다.
처녀시절 어떤 어른이 그랬지요.
“니는 왜, 빙신들 말을 돈 주고 배우러 다니노? 수영이나 볼링을 배우지 않고...한심하데이!”
당당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영이나 볼링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잖아요. 저는 장애인의 언어를 배워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어린것이 당차다고 했던 늙은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 엄마는 더 열심히 손을 휘저었지요.
착각이었을까요. 유뽕이가 엄마를 알아본 것만 같았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어쩐지 녀석이 그다음부터 기세 등등 더 잘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2절까지 흐른 노래가 끝나갑니다.
갑자기 무대 아래쪽에서 하얀 연기가 풍풍 솟아올라옵니다. 바로 유뽕이 발 앞이었지요. 출연자를 위한 소품이었나 봅니다.
열심히 수화하던 녀석이 깜짝 놀라 연기를 가르며 여러 번 손사래 쳐댑니다.
관객들이 박장대소를 했지요. 그게 바로 유뽕식 깜짝이벤트라는 걸 엄마는 알지요.
노래마친 파랑새반 친구들이 인사를 하자 양쪽에서 닫혀라 참깨, 주름막이 닫힙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여운에 휴대전화만 꼭 쥐고 있는데 진동음이 울립니다.
문자 여러 개가 한꺼번에 와있네요.
‘유뽕이 아주 잘하던데요. 지켜보던 도움반 어머니들 다 울었어요! 힘이 납니다.’
‘언니! 유뽕이 끝내준다. 나도 눈물 나서 혼났어. 덩달아 기분 좋네’
여기저기서 감동의 눈물바람 했다는 문자들이 쏟아집니다.
겨우 쓰린 눈가를 닦아내며 진정시켰는데 또 다시 목안에 뜨거운 게 넘어옵니다.
바보엄마는 여태 모르고 살았습니다.
유뽕이도 누군가에게 뭔가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을.
그것이 돈으로 결코 살 수 없는‘희망’이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녀석을 바라보던 따사로운 분들의 마음에 크게 보답한 것입니다.
행사가 끝난 후, 누나와 유뽕이를 데리고 평소 좋아하는 대형마트에 갑니다.
오늘은 엄마가 당연히 쏘는 날입니다.
유뽕이는 얼른 연두색 장난감버스를 집어 듭니다.
파랑새반 친구들에게 줄 선물도 샀습니다. 친구들도 일년동안 고생 많았거든요.
쇼핑 끝내고 막 주차장을 나오려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저...., 전화로 처음 인사드리지요? 도움반 1학년ㅇㅇ 엄마예요. 아까 유뽕이 수화 하는 거 보구 감동 받아서 저쪽 엄마들 다 울었어요. 유뽕엄마 찾으니 역시 울고 계셨구요. 저기요, 제가 내일 떡을 할 건데 유뽕엄마가 선생님과 아이들 마실 음료수 준비하실래요?”
흔쾌히 답을 드렸습니다.
유뽕이가 한 일이 얼마나 거대한데 까짓 음료수쯤이야!
어쩌란 말입니까.
밤늦도록 잠은 오지 않고 온 동네를 쑤시고 다니며 행복하다고 외치고 싶은데 말이지요.
선뽕누나는 기말고사에서 5등 안에 들고, 유뽕이는 감동왕자가 되었으니 엄마목이 갑자기 뻣뻣해 집니다.
눈물바다 헤매느라 혹사당한 눈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따끔거립니다.
흐릿한 모니터를 쳐다보면서도 입가는 헤벌어지니 가관이지요.
아! 정말 좋다!!!
유뽕이가 했던 수화노래 가사 옮겨 놓습니다.
읽기만 해도 눈물이 아른 거립니다.
(아름다운 세상) - 박학기 작사/작곡/노래
문득 외롭다 느낄 때 하늘을 봐요
같은 태양 아래 있어요 우린 하나예요
마주치는 눈빛으로 만들어가요
나지막히 함께 불러요 사랑의 노래를
혼자선 이룰 수 없죠 세상 무엇도
마주잡은 두 손으로 사랑을 키워요
함께 있기에 아름다운 안개꽃처럼
서로를 곱게 감싸줘요 모두 여기 모여
작은 가슴 가슴 마다 고운 사랑 모아
우리 함께 만들어 가요 아름다운 세상
2009년 12월 동짓날
유뽕 예술제에서 감동 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