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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뽕이 시리즈 32 - 느리게 걷다보니


BY 박예천 2010-09-09

 

   느리게 걷다보니



혼자서 미술학원가는 세 번째 날입니다.

엄마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뭐든 삼세번은 해야 되겠지? 오늘 까지만 숨어서 뒤따라 가보자!’

유뽕이가 인지학습 선생님 댁에서 나올 시간이 다가옵니다.

멀찌감치 숨겨둔 엄마의 자동차는 뜨거운 햇볕에 달구어졌습니다.

그늘마저 사라져버린 한 낮의 더위는 모든 것을 이글거리게 했습니다.

어느 곳을 쳐다봐도 전부 늘어지고 지친 모습뿐입니다.

선생님댁 건너편 아파트 건물 지하계단에 서서 엄마는 유뽕이를 기다립니다.

가만히 있는데도 끈적이는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옵니다.

살짝 엄마 마음이 약해지려 합니다.

에어컨 잘 틀어놓은 엄마차로 유뽕이를 태워 씽씽 데려다 주고 싶네요.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는 그때 유뽕이 모습이 보입니다.

납작하게 고개 숙인 엄마는 며칠 전의 스파이로 다시 돌아갑니다.

속으로 혼잣말을 하지요.

‘그래, 오늘까지야! 다음부턴 잘 해내겠지....., 꼭 그럴 거야!’

길옆 세워놓은 자동차들 곁에 바짝 붙어 한 칸씩 건너뛰며 유뽕이 뒤통수만 따라갑니다.

오늘은 최악의 폭염인 것만 같습니다.

새까만 길바닥이 프라이팬 열기처럼 후끈거립니다.


더워서 그럴까요.

유뽕이가 참 느릿느릿 걸어갑니다.

세상 급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갑니다.

지나가는 온갖 차들을 하나씩 오랫동안 바라봅니다.

부르릉 오토바이라도 지나가는가 싶으면 녀석의 시선도 오토바이 방귀소리를  기다랗게 따라갑니다.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가 있네요.

자동장치가 감지했는지 삐이-소리가 들려옵니다.

한참을 서서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숨어보는 엄마만 속이 탑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느림보 거북이가 되어 마냥 딴청을 할까요.

아파트 네 동을 지나는데 평소 걸어서 오 분도 안 될 거리가 이십분이나 지났습니다.

달려가 등이라도 밀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자동차와 지나가는 사람들 말소리에 유뽕이가 관심 두고 서 있습니다.

한숨 내쉬던 엄마는 잠시 딴 곳을 바라봅니다.

아파트단지 화단 안에 주홍빛 장미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곱기도 하고 외롭게도 보여 측은하게 여겨지네요.

‘더운 날, 너도 고생이 많구나!’

엄마의 속말이 어느새 장미꽃잎에 가서 닿았는지 더운 바람결 나풀 흔들립니다.

앞서 걷던 느림보 유뽕이가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

배를 불룩 내밀고 팔자걸음으로 어찌나 천천히 걷는지 뒤에서 빨리 가라 큰소리 낼 뻔했습니다. 정말 이러다간 해지기전에 미술학원 가게 될런지요.

천천히 걷는 녀석 따라가다 보니 그동안 놓치고 산 게 많았군요.

땅 위를 기어가는 수많은 개미떼도 보입니다.

단맛을 찾아가는지 일렬로 줄지어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무심코 발로 밟아 버렸을 곳에도 꿈틀거리는 삶이 있었네요.


저만치 이제 막 첫돌이 지났을 사내아이가 걸어 다닙니다.

궁둥이 잔뜩 귀저기 무더기를 뒤뚱거리며 귀엽게 아파트노인정 앞마당에서 떠날 줄을 모릅니다. 

‘우리 유뽕이도 저렇게 작은 아기였던 날이 있었지.....,’

엄마는 속으로 중얼거려봅니다.

느리게 걸어가다 보니 여기저기 구경거리 천지입니다.

힐끗거리며 좌우로 살펴보느라 이젠 엄마가 더 정신없어졌습니다.

유뽕이는 혼자 앞서 가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자동차로 달릴 때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온통 눈앞에 펼쳐있습니다.

과일장수 아저씨 트럭엔 새빨간 토마토와 올망졸망한 참외가 가득하네요.


아하! 이제야 알게 되는 엄마입니다.

그래서 유뽕이가 느리게 크는 겁니다.

세상 볼 것들 다 살펴보며 얘깃거리 챙기느라 느림보 거북이로 걷는 것이지요.


겨우겨우 도착한 미술학원 앞.

차도를 건너는 유뽕이가 눈에 보입니다.

역시나 팔자걸음 배불뚝이로 천천히 아주 느리게 걸어갑니다.

오가는 차들이 마침 없습니다.

학원이 있는 상가에 들어선 녀석은 조급해하지를 않습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유리사이로 보이는 슈퍼마켓 진열 상품들을 들여다보느라 힐끗거립니다.

저러다 오늘 안에 미술학원 문을 열기나 할지.

많이 늦었지만, 무사히 상가 건물 안으로 잘 들어간 유뽕이 뒷모습을 확인합니다.

 



유뽕이 보폭 따라 느리게 걷다보니 세상엔 볼 것이 참 많았습니다.

잔잔하게 느낄 것은 더욱 넘쳐났지요.

턱밑까지 흘러내려온 땀방울을 훔쳐내며 엄마는 빙긋이 웃어봅니다.

지독하게 더웠지만 가슴 후련한 오후였네요.

이젠, 오늘보다 더 먼 거리에서 유뽕이를 지켜봐도 될 것만 같습니다.

 

 


2009년 6월 26일

미술학원 느릿느릿(?) 혼자가기 세 번째 날에.


0개
원불화 2009.07.13 02.18 신고
느림에 미학이고 하더군요 우린 너무 빨리 빨리에 젖어서 살아온듯
저도 요즘 한가한 시간을 보내며 농촌에 들녁을 보며 어릴적 생각에 젖기도합니다 용케 잘도 참으셨네요 유뽕이의 모습이 귀엽군요  
  박예천 2009.07.13 11.05 수정 삭제 신고
아....! 원불화님.
방금 님의 글에 댓글 달고 나오던 중...시간이 흐른 제 글 보니 댓글 수가 늘어
들어왔습니다.
이런 댓글을 대하면, 뭔가 가슴이 더 따끔거립니다.
좀 묵은 글에도 관심을 주셨다는 고마움에~~
작가글방에서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장마철...건강 잘 챙기시구요^^  
살구꽃 2009.06.29 09.17 신고
유뽕이 정말 기특하지요. 혼자서 하나씩 세상을 향해서 걸어나가는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지금의 세상은 너무 정신없이 빠르게만 가자고 난린데..
유뽕이처럼, 가끔은 옆도 보고, 뒤도 한번 보고 걸어가야 겠어요.. 새벽부터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이깨서 잠도 설쳤네요.. 예천님도 오늘도 좋은날
되시길 바라면서 이만 줄일께요..^^  
  박예천 2009.06.29 11.08 수정 삭제 신고
살구꽃님!
여기는 아침나절 잠시 비가 뿌리더니 지금은 화창하답니다.
얼씨구나 빨래들을 널어놨지요.
조급증에 걸려 정신없이 살다보면, 가끔 이렇게 아들에게 한 수 배우게 됩니다. 천천히 걸으라는 일침이지요.
님도 가정사에 걱정많으신 줄 알지만, 잠시라도 쉬어가세요....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