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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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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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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씨.


BY 솔바람소리 2014-11-08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문해본다.

그리고 한동안 묵직하게 멍때렸다.

누군가 내게 물었던 질문이기도 했었다. 그때 난 반사적으로 없어!”로 쿨하게 대꾸했었다.

부쩍 고민과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삭으러든 뇌리의 해안가엔 생각의 쓰레기들로 뒤엉켜 엉망진창이 되곤 한다.

 

1117일은 아들의 논산훈련소 입대일이다.

어느덧 녀석이 21살이 됐다. 허리디스크로 인해서 MRI를 두 번이나 찍었지만 현역판정 2급을 받았다. 어미는 허리를 굽히기도 어렵다는 놈을 군대를 보내놓고서 두 다리를 뻗고 잠들 수나 있을까? 중학교 졸업식, 고등학교 졸업식, 돈에 쫓기며 살아가는 어미를 위해 녀석은,

요즘 누가 졸업식에 부모님이 따라와요? 걱정하지 마시고 엄마는 일이나 열중하세요.”

선수를 치며 어미의 갈등을 깨끗이 정리해주곤 했었다. 만근수당이 공제됨을 걱정하던 차에 가벼워진 마음으로 정말이야? 안 섭섭하겠어?” 상투적인 대꾸에도 그럼요!” 당당하게 답해주던 녀석이 이번에는 입소식도 친구랑 가겠단다. 그 말에 난 언제적부터 그랬다고 섭섭해지고 말았다.

 

어미는 일반 사립고등학교를 입학했지만 수능시험도 보지 않고 학점은행제로 대학에 편입하겠다던 녀석을 끝까지 말리지 못했었다. 학원한번 다니지 않고 제법 많은 전산자격증을 땄고 그 학벌로 들어가기 어려운 대기업의 전산보안 팀에 입사했을 때도 말리기는커녕...자랑스러워만했었다. 자주 걸리는 비상으로 인해서 집엔 며칠에 한 번 꼴로 다녀갔고 몇 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한 얼굴엔 어느새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짙어가도 마냥 듬직하다, 대견하다...그마져도 자만할까 속으로만 생각했었다.

 

고등학교의 학벌로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들 사이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몰랐고 온갖 잡다한 허드렛일까지 도맡아하는지도 모르고 무지몽매한 어미는 계획대로 공부도 틈틈이 하는 거지?” 부지런한 새가 벌레를 잡는다며 바짝 고삐를 당기곤 했었다. 입사한지 5개월쯤부턴가 허리가 아프다던 녀석이 다리가 저리다고 했을 때야 긴장이 됐던 것 같다. 병원에 갈 시간도 없다며 견디더니 6개월 차가 되던 어느 날 죄인의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엄마...죄송한데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

입사 할 때와 말이 많이 달라요. 공부할 시간도 없고...일은 더 많아지고...몸이 많이 힘들어요.”

세상이 만만하지 않음을 얘기했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물러나면 어디서도 견딜 수 없음을 틈틈이 잔소리로 일렀던 터였다. 녀석이 직장을 다니며 벌었을 수입에 대해서 언급한 적도 없었다. 미리 자신의 수입에 대해서 드리지 못함을 죄송해했고 대신에 앞으로 다닐 대학의 학비에 대해서 손 벌리지 않겠다고 기특하게 말해준 것만으로 속물의 어미는 믿음과 든든함으로 충만 했었다. 잔뜩 풀죽인 녀석의 모습에서 늘 엄격하기만 했던 어미였지만 더는 채찍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퇴사해서 새 일자리를 구하기까지 한 달여간의 휴식을 갖게 된 녀석을 데리고 간 병원에서 짐작대로 디스크를 진단받았다. 잦은 야간근무, 야식, 체중증가, 장시간의 착석업무로 인해서 디스크가 생긴 듯 하다는 의사의 말에 어미는 마음에 커다란 바윗돌이 들어앉고 말았다.

 

그런데 사람의 감정은 왜 한가지로 정의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녀석 또한 사람인지라 그랬을게다. 목숨을 다해서 소중한 내겐, 아들이었고 놈에겐 엄마였을게다. 아비란 존재 없이, 또 한 푼의 양육비도 없이 혼자서 남매를 키워내기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음에 늘 긴장을 늦출 수 없었고 나약할 수 없었다. 어미의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는 자식들이 자립하도록 지켜내야 했고 생존을 교육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매의 안일함과 나약함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솔선수범하는 어미를 본받기를 바라며 열심히 살았다. 그런 어미의 눈에 공부를 목적으로 정식직장이 아닌 알바를 할 수 밖에 없다던 아들 녀석의 모습에서 점점 우유부단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미의 잔소리에 녀석도 전과달리 점점 맞대응하듯 수긍심이 점점 사라져갔다.

 

어느 날, 무슨 계기로 녀석과 언쟁을 벌이게 됐는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심하게 서로가 흥분한 상태였다. 발끈하며 두 주먹 불끈 쥐고 발악하듯 덤비는 녀석의 모습에서 진저리나는 제 아비의 모습이 보였고 정나미가 떨어짐을 느끼고 말았다. “당장 나가버려!!!” 어미의 경멸 찬 고성에 녀석이 입고 있던 츄리닝 차림으로 집밖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하루만에 들어오겠지 했던 짐작이 틀어지자 더한 배신감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씨, 어디 안 간다. 새끼라고 키워봐야 공도 없고 너만 골병들어. 지 애비한테 줘버리고 내려와라.”

 

갑작스레 애들 아빠가 집을 나가서 가정을 등한시한지 2년쯤 접어들었을 때 변호사를 선임하고 재판이혼을 진행했다. 그리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만 떠안고 있던 모든 사실을 양쪽 집안에 고했다. 놀란 시댁에서는 내 마음이 돌아서길 바랬고 친정에선 왜 그동안 혼자 마음고생하고 있었냐며 분개했다. 그리고 이내 하셨던 친정 부모님의 말씀들이었다. 그 씨...에 대한 부모님의 걱정에 나는 단호하게 그 씨지만 어미의 피와 살로 빚어졌음을, 어미의 사고를 익혔음을 그리고 결혼생활 내내 아비에게 벌써부터 버림받은 듯 자랐던 자식들임에 어미마저 버릴 수 없음을 말씀드리며 양육권 갖겠다고 고집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