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213

아들의 어미


BY 솔바람소리 2009-11-11

며칠 전이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를 비롯해 좋은 말들을 이론으로 섭렵한 바 있는 어미가 몸소 실천하지 못하고 중 3의 아들 녀석을 다그쳤던 날입니다. 늘 그렇듯 큰일이 아닌 소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어미가 정해놓은 정도를 벗어난 행동을 탓했던 날이었지요. 5살 터울 지는 여동생과 하루에도 몇 번씩 눈만 마주쳤다하면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특별히 대수로울 것도 없는 평소의 일상이 되었지만 중 2부터 부쩍 까칠해지던 녀석이 이제 부모가 있어도 어른인양 동생의 실수를 호되게 꾸짖곤 합니다. 그 모습이 저희들을 대하던 어미와 흡사합니다. 깍쟁이 같은 딸내미는 제 오빠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생각 없이 행동을 일삼으며 심기를 건드렸다가 호되게 당하곤 했지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은 십중팔구 딸을 두둔하고 나섰습니다. 동생에게 배려를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어미까지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을 거들먹거리며 두 녀석의 잘잘못을 따져 똑같이 혼을 내곤 했지요. 하지만 어미도 별 수 없이 마지막 말은 늘,

 

“오빠이기에 양보를 할 수 있었어야지. 남자이기에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야...”

 

남편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충고였습니다.

1남1녀의 장남인 아들에게 부모는 해주는 것도 없이 거는 기대만 큰가봅니다.

잘 먹이고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늘 미안한 어미는 어불성설, 짜증과 감정 섞인 잔소리만 퍼붓기 일쑤입니다.

 

작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아들 3천원, 딸 2천 원씩을 꼬박꼬박 챙겨주면서 용돈기입장을 작성하게 했습니다. 딸아인 어미의 말을 곧잘 따르는 반면 아들은 그것이 쉽지 않다며 빼먹기 일쑤였지요. 2천원 받는 동생은 저금까지 하는데 3천원 받는 오빠는 주는 족족 군것질을 해댔던 기록이 기입장에 남아 있곤 했습니다.

 

아들 또래들의 용돈이 어느 정도인지 어미도 알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 한창 피시방으로 도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요즘 세태와 상관없이 크게 동요하지 않으며 자라나는 아들이건만 장남을 이유로, 동생의 본보기를 이유로 계획성 없는 태도를 훈계하곤 했던 어미에게 그날도 호되게 잔소리를 듣고 말았지요.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설거지를 끝내기가 무섭게 아들이 연필 한 다스 정도크기의 포장 박스를 내밀었습니다. 선물이랍니다. 아무 날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정쩡한 모양새로 어미가 포장을 뜯었습니다. 용돈을 남김없이 써대던 녀석이 쓸데없는 물건을 샀겠구나, 넘겨짚었지만 고맙다는 말은 할참이었습니다. 헌데 포장을 뜯고 본 박스의 물건은 아들의 능력으론 쉽게 구입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얼핏 봐도 고가의 물건이었습니다. 모양새도 심플한 흰색의 무선이어폰이 그것이었습니다. 고맙다고 하려던 말은 어느새 저만치 사라지고 걱정이 들고 말았지요.

 

“뭐야? 이거 얼마야? 네가 무슨 돈으로 이걸 샀어?”

 

어미의 입에선 걱정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놀란 어미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아들은 차분한 모습과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 돈으로 샀다고, 그 동안 용돈을 쓰지 않고 오랫동안 모았다구요.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동전이라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 가르쳤던 어미 밑에서 자랐던 아이들은 지금껏 그래왔습니다. 아들이 저학년 땐 길바닥에서 주웠던 천 원짜리 지폐를 지구대에 가져다주고 볼펜을 받아왔던 일화가 있을 정도니까요. 남의 물건이나 돈에 손을 대서 장만한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걱정 많은 어미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웬 것일까 걱정이 태산과 같습니다. 그런 어미에게 아들이 말합니다.

 

“사실은 이것 산지 이틀 됐어요. 엄마가 화내실 것이 분명해서... 하지만 이제 혼나더라도 드릴래요. 아빠 허리 주물러 드리고 받은 거랑 엄마가 주신 용돈, 사실은 쓰지 않고 동전까지 모두 모아뒀어요. 엄마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산거니까 금액은 제발 묻지 마세요. 놀라실 테니까요.”

 

어미는 평소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속상하거나 슬플 때마다 mp3를 듣곤 했습니다. 걸레질을 할 때나 주방 일을 할 때마다 이어폰을 꽂은 mp3를 주머니에 넣거나 주머니가 없을 땐 브레지어 안에 넣고 늘어지는 이어폰 줄을 이쪽저쪽 넘기는 것을 감수하며 말입니다. 녀석이 그동안 그것을 흘려보지 못했는가봅니다. 녀석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그 순간 고맙다기보다 살짝 괘씸했습니다. 학생신분으론 거한 금액의 물건을 상의 없이 구매했다는 것과 학교에서 도서부원으로써의 봉사 때문에 늦었다던 어느 날이 물건을 구입하기 위한 핑계였다는 생각이 미치고 말았으니까요. 천성인양 잔소리를 늘어놓는 어미 앞에서 아들이 mp3를 가져와서 작동을 시켜줍니다. 줄도 없이 앙증맞은 무선이어폰에서 감미로운 음향이 잘도 흘러나옵니다. 어미의 구겨진 인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의 얼굴이 흐뭇해집니다.

 

“언젠가 제가 그랬었지요? 엄마 몸이 힘들어 보였을 때 목욕탕에 다녀오신다면 때 미는 값을 드리겠다구요. 끝내 가시지 않고 차라리 돈으로 주라고 하셨을 때 농담이었다고 했지만 실은 잠시 갈등이 생겼었어요. 그동안 모은 돈을 드릴까, 하구요. 하지만 엄마는 분명 제가 돈을 드리면 저희에게 쓰셨을 거예요. 나중에 꼭 정말 필요한 것을 사 드리고 싶었고 그게 오늘이에요.”

 

꺼내놓는 말들까지 못난 어미의 입을 막을 것들뿐이었습니다. 어디서 샀는지 묻는 질문에 끝까지 답을 하지 않던 녀석이 엄마가 다시 돈으로 바꿔 올까봐 말할 수 없다며 굳건합니다. 결국 고맙다는 말을 겨우 꺼낸 어미는 아들에게 다짐하나를 받았습니다. 훗날 반듯한 사회인이 될 때까지 마음이 담긴 편지 외에 선물은 사양이라고 말입니다. 그럴 돈으로 학교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쓰자고 말입니다.

 

그날 늦은 밤에 잠이 든 아들 방으로 들어간 어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과를 했습니다. 계획과 개념 없이 살아간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던 것들과 일주일에 3천 원 밖에 주지 못하면서도 허투루 쓴다며 꾸중하던 것들까지 모두모두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어느 부모처럼 ‘공부를 못해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는 너그러운 말 한마디 해준 적 없는 것까지 모두모두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아들은 동생과 싸워서 어미의 호된 잔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평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지만 어미의 마음은 한결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헛살아온 것 같다는 상실감이 조금은 사라졌거든요. 아직까지는 인성교육에 있어서 남들에게 뒤지지 않은 것 같은 자부심이 어느새 어미의 마음속에서 새순처럼 자라났습니다. 17년 인고의 세월에 소유하게 된 작은 행복이지만 살아가는 동안 마음이 겨울날처럼 차갑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