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름내 푸르던 길가의 가로수들이 어느 날부턴가 촉촉이 내린 가을비 뒷자락으로 장미처럼 빨갛고, 개나리처럼 노란 이파리들로 형형색색 바뀌어가고 있다. 그것이 제색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지? 그래, 가을이구나!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선채로 그것들은 누구보다 바쁘게 제 몫을 수행하며 1년 12달, 4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매 해, 매 순간.
유년시절 이때쯤이면 내가 자란 고향 갯마을엔 비릿한 바다향보다 코스모스의 진한 꽃향기가 물신 풍겨나곤 했다. 추수가 끝난, 빈 논두렁을 낀 양쪽 길가로 한해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누가 심긴 듯이 나란히 분홍빛, 흰 빛깔의 코스모스가 만발하곤 했다. 어쩌다보니 도심 한복판에 뿌리내려 살게 되었고 그 흔하디흔했던 것을 막연하게나마 계절을 알리는 자료로 등장하는 TV화면을 통해서 접하게 될 줄은 그땐 상상이나 했으랴. 그 시절 내겐 작은 바람에도 힘없이 흔들리는 코스모스가 결코 향기롭게 여겨지지 않았고 잎사귀마저 바다에서 막 건져낸 파래가닥처럼 엉키고 설 킨 듯이 산만하게 보였다. 그 가지런하지 못한 꽃은 장미나 목련, 무궁화처럼 봉우리지지 않은 모양새로 뜯어내기 쉽도록 생긴 갈래진 꽃잎에 꽃잎 끝 모양조차 매끄럽지 못하고 들쑥날쑥했고 그마저도 탐탁지 않았다. 그것들은 어린 내게 흡사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와 같았다. 정작 꽃에겐 무심했지만 차라리 무성한 코스모스 사이를 온몸에 노란 꽃가루를 덕지덕지 묻히고 다리 한쪽엔 노란 꿀 자루를 맨단 채로 꿀벌들이 열심히 날아다니는 모습에 흥미를 느끼곤 했었다. 독한 향기에 끄떡없는 벌들은 분명 코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던 그 시절이 이리 그리울 수가 없다. 후회한다. 그 때를. 보고 싶다, 코스모스.
눈부신 햇살이 여름을 닮아있었다. 뜨거웠던 그 계절로 여기며 반팔 티를 입은 그대로 집밖을 나섰다가는 낭패를 보기 딱 좋은 태양 때깔이다. 어느 때보다도 푸르른 창공으로 떠있는 구름의 모양새가 영락없는 솜사탕이다. 낡아빠진 흩어진 이불솜 같지 않고 뚜렷한 것이 보기 좋다. 두둥실 떠오를 수만 있다면 폭신할 것만 같은 그곳 위에서 뒹굴고 싶다는 유아적 몽환을 상상해보았다. 이 나이를 어디로 먹은 겐지... 하긴, 60을 바라보는 큰 시숙 내외가 불혹을 코앞에 둔 내게 꽃다운 나이(?)를 운운했었지. 이 나이가 누군가에겐 늙어빠진 중년 아줌마로 보일 테고 또 다른 이들에겐 꽃다운 시절로 보일 테지. 애매한 나이에 정신마저 모호해선 결코 아니 될 나이가 또 이 나이가 아닐 런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계절만 되면 가을바이러스에 걸려버리곤 했다. 늘 똑같은 일상, 그 속에서 유난히 외로웠고 고독했다. 징글맞게 무기력했으며 삶의 의지마저 희박해졌다. 작은 봇짐하나 싸들고 세상과 담 쌓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떠나고픈 몸과 마음을 한 아름 안겨주던, 내게 있어 징글 맞곤 했던 이 계절에 어김없이 들어서고 말았다. 손수 김장을 담아본 적 없는 돌팔이 주부경력 17년 차. 하얀 서리가 내려앉을 초겨울을 문턱에 둔 늦가을이면 주변 이곳저곳에서 김장을 언제 해야 하나 고심들을 했지만 이 몸은 고질적인 심적 병마들이 총망라해서 극에 달해 뇌를 채웠고 가슴을 공략해대는 통에 진저리 쳐댈 통증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달력을 보지 않고도 명확하게 김장철을 직감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허나...
한 곳의 오랜 통증엔 무뎌진다고 했던가?
그 오랜 고질병이 이젠 좀 시들해진 듯하다. 며칠 전부터 가슴 한쪽이 때때로 시려왔고 머릿속이 한 번씩 온통 한겨울의 어느 날처럼 을씨년스러워지곤 했지만 그뿐. 아직까진 그 여파에 시달리지 않고 있다. 기뻐해야할 일인가는 모르겠다.
현실에 맞서려고만 하던 것과 부정하려고만 했던 것을 접고 보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 나만이 옳은 줄 알았다. 나만이 힘든 줄 알았다. 이 몰골을 하고서도 꽤 잘랐다는 오만함에 빠져 살았다는 어리석음을 통감해가는 중이다. 내게 속한 내 모든 것들이 소중하듯이 개개인마다 그들의 것이 그들에겐 하나같이 소중할 것이라는 것을 이론이 아닌 마음으로 터득해 가는 중이기도 하다. 아직은 모두 현재 진행형, 결코 도달된 마음이 아니다. 지금껏 살아온 성질이 습이 되어 베어버린 심보가 재채기처럼 불쑥, 발끈거리며 튀어나오곤 한다. 하지만 감기와는 사뭇 다른 기침정도로 여겨진다. 명확한 것을 하나로 정의(定義)하던 것이 때론 하늘과 땅의 위치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수긍해가는 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은 이것이 내게 있어 장족의 발전인지 아니면 망연자실과 자포자기가 뒤섞인 심정인지 분간할 순 없다.
가을, 그래도 이 계절은 쉬이 넘길 수 없는 마력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차분히 지난날을 되짚어 보거나 앞날을 향한 근심을 이웃집 담장 안에 감나무 열매 맺은 듯이 주렁주렁 생겨나는 것을 막아낼 재간이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2.
며칠 전이다.
몇 해 전부터 친정아버지의 고추농사가 본업이 된 이후로 졸지에 수입 없는 중개상 노릇을 일임 받게 되었다. 주변사람들에게 근에 12,000원 하는 작지 않은 금액의 고춧가루를 강매하는 심정으로 떠넘겼지만 빛깔이 곱고 확실히 김치 맛이 틀리다는 이유로 부탁하지 않아도 이듬해부터 고춧가루를 찾아 준 탓에 이번 해엔 물량이 찾는 이에 비해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 아래층에 살고 있는 80대 중반의 연세에도 아직까지 아들과 대학을 다니는 손자, 손녀 남매를 위해 살림을 놓지 못한 깡마른 외모와 달리 정정한 할머니께서 한발 늦게 고춧가루를 부탁해오셨다. 해마다 10근씩 사셨던 할머니셨지만 이번 해엔 달리 말이 없으셨기에 빈곤한 살림에 며느리도 1년 전쯤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는 공공연한 소문이 돌은 터였고 변변한 직업이 없는 아드님과 무슨 수로 두 아이가 나란히 학비 비싼 대학을 다니는지도 불가사의한 형편을 어림짐작하며 따로 여쭙지 못한 것이 내심 죄송할 지경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지 며칠이 훌쩍 지난 후에 친정에서 연락이 왔다. 예약받았던 30근 가량이 사정이 있어서 취소됐다며 살 사람을 알아보라셨다.
10월로 접어든 지가 얼만데, 사람들이 찾았다가 발길 돌린 지가 또 얼만데,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별 수 없이 이곳저곳으로 전화기를 돌려야했다. 짐작대로 모두들 벌써 고춧가루를 구입하고 난 후였다. 그들의 아쉬움 섞인 원망까지 덤으로 들으며 겨우 20근을 팔 수 있었지만 아직 남은 10근이 있었다.
고춧가루 팔았다고 내게 10원짜리 동전하나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가져다 먹은 것이 얼마며 받아 쥔 것이 또 얼마였던가. 부모님의 은혜의 백만분의 1이라도 갚는 심정으로 해마다 감자와 고춧가루, 고구마, 깨, 콩들을 최선을 다해서 팔아드리곤 했지만 이번 같은 일이 한 번씩 생길 때마다 여간 마음이 심란한 것이 아니었다. 남동생들은 시간 틈틈이 농사일을 도우라며 불려 내려갔지만 난 돕겠다고 자처해도 약값이 더 든다며 밭 근처에도 데려가지 않으신 부모님이셨다. 가져다 먹는 것은 동생들의 갑절 이상, 짜증을 겉으로 들어 냈다 간 벼락을 맞아도 열두 번은 맞을 것이고 길바닥을 잘 거닐다가 개똥에 미끄러져서 없던 소똥에라도 처박힐 일이며 뒤로 자빠져도 쌍코피가 터지고 무릎마저 깨질 괴변을 당할 일이다. 참으로 여러 생각을 안고서 마지막으로 아래층 할머니 댁으로 전화를 드렸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할머니의 아드님이 전화를 받으신다. 그리곤 할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것을 전해들었다. 며칠 전 수술을 받으신 할머니께선 중환자실에 계셨다가 일반병실로 옮겨진지 이틀째란다. 병원과 병실 호수를 메모하고 전화를 끊어야했다.
대쪽 같은 성격에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분은 바람나서 집나갔다는 며느리에 대해서 굳이 여쭙지 않아도 돈 벌러 다니느라 애쓴다는 안부를 만날 때마다 간간히 알려주시곤 했다. 시골서 올라온 곡식들을 나눠드리면 손녀딸이 아르바이트로 다닌다는 제과점에서 날짜 지나 얻어 온 빵을 가지고 올라오셔서 사 오신 듯 말씀하셨다. 그 분을 대할 때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성향이 똑 닮은 외할머니가 떠올라서 친근하게 정을 느꼈던 터였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았고 간간히 떠오르는 의아함을 목구멍 깊숙이 삼켜버리릴 수 있었다.
그런 가엽은 분이 병원에 누워 계시다면 병원에서 수발은 누가 든단 말인지. 또다시 앞뒤폭 넓은 오지랖이 발동했지만 도울 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리고 검은콩두유 한 박스를 사들고 찾게 되었다. 풀죽은 모습의 손녀딸이 곁을 지키고 있는 병실에 누워있는 할머니는 흡사 미이라와도 같이 창백했다. 한층 깊숙이 페인 주름진 피부가 환자복 밖으로 도드라져보였다. 산소기 관(管)과 피부 이곳저곳에 꽂힌 채로 나쁜 피를 빼내고 있는 관(管)들이 할머니 몸 위로 뒤엉켜있었다. 그 순간 어린 날 보았던 손닿을 수 없는 높은 거미줄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체념한 듯 죽음을 기다리던 잠자리가 떠오르고 말았다. 가엽고 불쌍하던 그것의 모습이. 숨 쉬는 것조차 가냘파서 가슴의 미동조차 느낄 수 없는 할머니셨다. 며칠째 힘이 없어서 용변을 보지 못한 탓에 간에 이상이 생겼고 급히 수술을 받아야 했다는 설명을 할머니를 닮은 뵈는 중년의 여인이 손에 물기를 닦으며 병실로 들어섰을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엄청시리 큰 집에서 잘 꾸미고 산다는, 할머니를 통해서 간간히 들었던 그 따님인 듯 했다. 열흘 이상 식사를 하지 못하셨다는 할머니는 눈뜨는 것조차 힘겨워보였다. 그런 지친모습이 역력한 분이 내가 병실로 처음 들어섰을 땐 잠시나마 눈을 둥그렇게 뜨셨다. 그리곤 바쁜데 어째 왔냐는 걱정을 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가로수들과 하늘이 화려하고 청명했지만 표현할 수 없는 울적함이 다시 한 번 재채기처럼 마음 한편으로 터져 나왔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따님이 돈 많은 부자이길 바랬다. 그 분의 행색이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검소함을 지닌 분이시기에 그러실 거라고 믿고 싶었다. 오래있는 것도 민폐가 될 것 같아 일찍 나서기 전에 충동적인 마음으로 가방 속에서 꺼낸 3만원을 따님에게 건네며 “할머니 맛난 것 사주세요.” 했을 때 바로 조카에게 그 돈을 일임하듯 건네며 “애들이 고생이 많죠.” 했던 분이 부디 할머니 말씀처럼 엄마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효녀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파리한 손을 힘겹게 내게 내밀었을 때 요즘 두려움의 대상인 ‘신종플루’가 혹시 병실로 올라오는 중에 내 손에 묻어 할머니께 전해질까봐 마주 잡아드리지 못한 것이 오는 내내 걸렸다. 내가 플루를 걱정하며 잡아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지만 그 분... 노인네 환자 손이라 일부러 피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할머니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해서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그럼 곧 달려가 얼굴에 뽀뽀라도 해드려야지.
오늘은 유난히 햇살도 좋건만 병실에 누워 계실 아랫층 할머니를 비롯해서 나의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탈 없이 하루를 살아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든다. 센치한 열병을 앓아야 하는 가을바이러스에 젖어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