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온지 어느덧 6년으로 접어
든다. 한 곳에서 이리 오랫동안 살게 될 줄이야.
서울 살이 17년, 남의 집 살이 또한 17년.
이러다가 자식들을 모두 이곳에서 여의고 손자손녀들까지
맞게 되는 것이 아닐런지...
이사 온지 얼마 안돼서 일이다. 아빈이 방에서 아영이까지
데리고 셋이 잠이 든 새벽쯤 잠이 깨고 말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잤던 기억으로보아 계절이 여름이었지 싶다.
어쩌다 깨고 말았는지 잠이 훌쩍 도망가 버린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깰세라 뒤척임마저 조심스런 순간에 어디선가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흑~! 아흑~!... 허억... 허억...”
어느 집 여인의 신음소리가 적막을 깨고도 남을 음향으로
아들 방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고통스런 여인의 신음에
119를 불러줘야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타고난 오지랖을 안고
육중한 몸집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밖은 달빛마저 잠든 듯 어둠 속에 휩싸여 저만치
떨어져있는 가로등 불빛을 의지하고 있었다. 벽돌처럼 네모
반듯한 5m쯤 떨어진 앞 건물부터 또 다른 이웃건물들이 모두
바둑판무늬같은 열린 창문으로 어둠을 묻히고 서있었다.
“허억... 허억... 으으읔... 허억......”
여전히 어디선가 괴음이 계속되었지만 그곳이 어디쯤인가
가늠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삐그덕 거리는 침대의 소음이 여인의 신음소리와 함께
일정하게 울리는 것을 듣고서야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멜로영화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던 소재 중에 하나로 값싼 모텔 안,
벽 사이를 두고 건너 방에서 얼굴도 몰라요, 성도 모를 색골 진(?)
남녀의 끈끈하고도 힘찬 육탄전에 잔뜩 흥분된 리얼한 음향(?)까지
들려오자 주인공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하던 묘한 장면이
벌어지곤 했다.
이웃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영화 속 모텔 건너 방에서 들려오던
그 소리와 똑같은 거였다. 다른 거라면 픽션이 아닌 리얼이라고나
할까.
‘내가 이사 온 곳에 화끈한 부부가 사는 군’
남의 부부가 야한 밤을 보내고 있는 시간에 깨어나고만 나는
더운 날 창문을 닫아야하나 말아야하나, 난처한 고민 속에서
“에이~ 씨팔~!” 술 취한 남편이 잠결에 뱉어내는 소리까지
귀에 담고 있어야 했다.
“어흑... 어흑... 허어억~!”
여인의 신음은 곧 숨이 넘어갈 듯 극에 달했다.
곧 끝나겠지...하는 묘한 맘 정리를 하며 드는 의문이 있었다.
‘저 집엔 깨어날 다른 가족들이 없는 거야? 그리고 저 소란에
깨어난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걸까? 그나저나 1년에 몇 안되는
행사처럼 벌이는 밤일을 벌임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해야겠구만‘
별별 잡다한 생각들을 껴안고 있는 시간동안
대단한 밤일을 벌인 어느 이웃여인의 신음이 30여분가량
이어졌던 것 같다. 졸지에 호기심 지닌 염탄꾼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저러다 어느 집 여자 죽는 것이 아닐까, 저리 죽으면 뉴스에 뭐라고
보도가 되려나, 이웃에 변강쇠와 옥녀가 살게 될 줄이야,
그들의 밤일이 얼른 끝나기를 바라며 여전히 상념 속에 있을 때
어디선가 물을 틀고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왕 염탄꾼(?) 된 것 어떤 집인가 확인이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슬며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이 마주한 건물,
마주한 층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거였다.
그 밤 후로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그들을 의식하게 되었다.
40대에 가까워 보이는 우람한 덩치의 여인과 그보다 더
육중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이 간간히 그들의 베란다 창안으로
보였다. 초등 4~5학년처럼 보이는 남매의 모습과 함께.
부부는 낮 동안에 아이들이 난리굿을 벌이며 소란을 떨어도
개의치 않았다. 간간히 밥 달라는 아이들의 성화에도 여인은
‘니들이 차려 먹어.’ 하는 식으로 성의 없이 대꾸하기도 했다.
개방인지 포기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들이 정상적인 가족일까
의심을 품기도 하였다.
그들의 요란스럽고 낯 뜨거운 소음이 한 달에 3~4번꼴로
일어나곤 했다.
부부의 뜨거운 사이가 내게 있어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지만
밤낮으로 소란스런 그들이 여러모로 달갑지는 않았다.
어느 밤 남편의 소란스런 술 잠버릇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깨어있었다. 때맞춰 숨넘어갈 듯, 오묘한 이웃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말았다.
“엄마, 저거 무슨 소리에요?”
아빈이가 어김없이 묻었다.
“!... 어...떤?” 당황한 나는 등줄기까지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잖아요. 어떤 아줌마 소리 같은데요?”
“글세... 아줌마가 어디 아픈가보지...” 얼버무리고 말았을 때
“많이 아픈가보다. 저렇게 크게 소리를 내는 걸 보면...”
걱정스런 아빈이의 말에 이어 아영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엄마, 저 아줌마 병원가야겠지요?”
더위보다 더한 열기가 당황한 몸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그날 이후로 더더욱 마음이 불편한 이웃으로 여겨졌다.
때론 발끈했던 심보로,
‘거 좀 조용히 합시다~! 댁들 때문에 내가 까만 밤을 하얗게
지센 것이 한두 번 인줄 알아요? 꼬집어 댄 허벅지 살은 또
어떻고!‘
따지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 주던 이웃의 짐들이 어느 날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사를 가는 듯이 보였고
생각은 적중했다.
기쁜 마음에 떠나가는 그들의 길목마다 레드카펫이라도 깔아주고
싶었다.
곧 새로운 이웃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속담에 있는 <산 넘어 산>이란 말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환갑이 가까워 보이는 홀쭉한 남자가 빤스만 입고 활짝
열린 창 안에서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기본으로
새벽 2시도 대낮처럼 떠들어대는 덩치 좋은 40대로 보이는
아줌마와 엄마를 닮아 보이는 고학년의 남매가 나누는
대화는 귀를 막아도 들릴 정도였다.
“엄마, 족발 시켜, 보쌈 시켜?”
“아무거나 시켜, 새꺄~!”
그들의 야식 메뉴가 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고
“엄마, **는 삼겹살 구워 달래. 나는 라면 끓여주고.”
아침식사를 뭐로 하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들이 스테레오로 전해지곤 했다.
아빈이보다 1년 선배라는 그 집 아들이 종종,
“야이 개년아!.............” 라든지,
“개같은 년이................”하는 식의 거한 욕을
해댈 때마다 내 새끼들이 듣고 배우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안고 살 던 어느 날 그 집에 정말 짖지 않는 ‘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개년>과 <개같은 년>으로 지칭된
것으로 짐작컨대 그 개는 암캐였을 것이다.
때론,
“있잖아, 저 욕이 정말 개한테 하는 거더라. 니들은
개 키우는 것 아니니까 저런 말 쓰면 안된다.“라든지
라면은 몸에 좋은 것이 아니다. 어쩌다 한번 먹을 수 있지만
결코 아침에 먹을 것이 못 된다,는 것까지
웃기지도 않을 부연설명들을 늘어놓아야 할 상황에서
씁쓸함을 맛봐야 하기도 했다. 앞전 이웃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희한한 이웃을 만났구나.
뭐 저런 사람들이 다 있지?
우리가 이곳을 빨랑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데...
저질도 저런 저질의 부류는 보다보다 첨 본다.‘
그들의 소리를 접할 때마다 드는 마음으로 무시와 멸시를
하게 되었다. 그런 마음으로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이웃여인과
얼굴을 마주칠 때가 있었지만 외면하게 됐고 창밖으로 아빈이를
약 올리는 그 집 아들을 보게 되었을 때 엄한 목소리 꾸짖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과 벌써 오랜 이웃으로 살고 있는 요즘.
이웃여자는 여전히 밤낮없이 깨어있는 시간이면
창밖을 대고 ‘하~아암!’하는 괴상한 하품소리와 화장실
쟁탈전을 벌이며 단어선정 또한 직설적으로 했으며
아침식사의 메뉴를 종류도 다양한 고기와 라면에서
고민하는 것까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듯이
떠들어대며 살고 있지만 그들을 대하는 내 마음이
변했다.
쌍소리가 취임새처럼 달고 사는 그들이지만, 재채기 소리조차
망측함에 가까운 이웃여자지만 넉넉해 보이지 않는 삶을
그들 방식에서 즐긴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놀라울 덩치의 엄마와
그녀를 똑닮은 대학생 딸과 고등학생이 된 아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오히려 작은 생각의 틀 속에서 체면을 따지며 욕구불만을
가득 담고 살아가는 우리 집보다 훨씬 낫은 것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을 향한 거부반응이 사라져버렸다.
단지 이제 이곳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맞고 싶은 욕구가
불만으로 바껴가고 있을 뿐이다. 남눈치 보지 않아도 좋을
내 집을 갖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