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농협인터넷뱅킹을 설치하고 우연찮게
내 명의의 통장 속에 천만원을 훌쩍 넘는 적지 않은
돈이 비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동명이인의 남의 것이 은행의 업무실수로 화면에
올라온 줄 알았다. 하지만 얼마 뒤 그것이 내 명의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해서 받은 첫 월급봉투를 엄마에게
고스란히 건냈던 다음 날 바다일로 바쁜 중에 언제 틈을 내셨는지
내 명의로 통장을 개설해서 월급을 고스란히 넣어두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다달이 십 원짜리 하나 건들지 않고 건넸던 월급이었고
그 이상의 돈을 다달이 용돈으로 받아서 썼던 나는 1년을 넘게
다녔던 직장을 다시 몸에 이상이 생긴 탓에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는 건넨 적 없던 월급봉투였다.
부모님께서 나를 언급하실 때 간간히 <돈 덩어리>를 운운하셨다.
내게 들어간 거액의 수술비들을 비롯해서 약값들이며 키워 온 과정
내내 돈과 나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거금들을 잡아먹으며(?)
애를 태웠던 딸이었기에 그러셨을 것이다.
그나마 갖고 있던 양심이 내 통장은 잘 있느냐고 한 번도 물어
본 적 없게 했고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결혼해서 7~8년쯤 됐을 언젠가 이사를 해야했을 당시에 부족한
천만원가량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을 때 마련해줬던 엄마에게 갚을 수 있는
돈이 생겼을 때 알려달라던 계좌번호의 예금주가 내 이름으로
되어있었을 때 ' 왜 내 이름이지?' 살짝 들었던 의문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엄마의 비자금을 내 눈으로 확인한 순간, 뒤늦게 20년쯤 된 통장을
엄마가 아직까지 관리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고 잠시 놀랐다. 그리고
밀려드는 배신감과 섭섭함이 엄마와의 사이에 골짜기를 만들었다.
반대한 결혼을 감행한 딸래미의 빈곤한 삶을 걱정했던 내 엄마는
늘 쌀통의 쌀과 아이들의 분유와 냉장고의 김치가 떨어질 것을
계산이나 하고 있던 사람처럼 3~4시간가량 버스와 지하철에
시달리는 것을 감수하고 돈 준대도 살 수 없다는 서울행을 감행하며
간간히 불쑥 찾아오는 이벤트를 선사하셨다.
매번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김치 통을 양손으로 들고 오는
것을 시작으로 앉지도 못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집안
곳곳을 확인하여 목록을 꼼꼼히 체크하고 시장과 슈퍼를
돌며 필요한 것들을 위해 속옷도 꿰매 입는 분이 씀씀이 큰 듯,
통이 큰 듯 물 쓰듯 돈을 쓰시며 필요한 것이 더 있는가를 내게
되풀이해서 묻기도 하셨다.
구입한 물품들로 냉장고와 쌀통을 비롯해서 집안 곳곳을 채워놓고
나서야 늦은 저녁에 매번 퇴근이 늦는 사위의 얼굴도 보지 못한
상황에서 안주도 없이 깡소주 잔을 기우리곤 하셨다.
왜 안주 없이 드시냐며 엄마가 만들어 놓은 반찬들을 꺼내서
내놓을라치면 “ 한 입이라도 너 먹어라.” 하시며 돈 덩어리, 귀한
딸이라던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거친 손으로 내 얼굴을
쓸어주곤 했던 엄마는 손자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른 새벽부터
혼자서 고기잡이로 힘들었을 아버지를 도와야 한다며 술 냄새를
풍기며 잠에 빠져있는 사위를 깨우지 못하게 했다. 아침밥도 거르시고
나오지 말라며 부리나케 나가시기 전에 도톰한 돈뭉치를 내 손에
쥐어 주시며 소리 낮춰 남편과 아이들만 챙기지 말고 먹고 싶은 것
사먹으라며 돌아가시곤 했던 엄마의 뒷모습을 난 수없이 겪었다.
“언제나 엄마 마음 편하게 해줄래? 내 딸이... 내 귀한 딸이
어쩌다 이리 됐을까... 썩을 놈...“
술 한 잔에 말문이 터지면 시작돼는 대사에도 엄마는 눈물을
흘린 적 없었고 나 또한 흘리지 말아야 했던 눈물이었다.
그 상황에서 눈물을 보이게 된다면 정말 비참해지고 말 것 같아서
천하에 강한 엄마의 딸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참아야 했던 나였고
당신의 약한 모습에 딸이 더 나약해질까봐 겁이 났을 엄마였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은 늘 들썩였고
그런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봤던 내 어깨도 면목없어서 매번 들썩거렸다.
그래... 잘 살거야... 이제 엄마에게 손 벌리지 않고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 갈 거야. 정신 못 차리는 남편을 어떻게든 사람
만들어서 떳떳하게 살아 갈 거야...
다짐했던 각오들이 매번 물거품이 되어버릴 때마다 어린 내 자식들을
굶길 수 없어서 벼룩보다 못한 인간이 되어 낯도 없이 엄마에게
매번 구원요청을 해대곤 했다. 매번 엄마는 응해주었다.
이제 돈이 없다, 언제까지 이럴래, 더 늦기 전에 그만 살아라,
따라붙는 걱정들이 있었지만 긴 한숨 끝에 며칠 안에 서울을 찾거나
통장으로 돈을 붙여주시곤 했다.
그랬던 엄마가 4~5년 전부터 변하셨다.
발길을 끊은 것은 물론, 명목이 확실한 몇 푼의 돈 외에 내게
건네는 법이 없으셨다. 처음엔 섭섭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모님의 연세와 전과 달라졌을 수입, 출가한 자식들과 손주들이
늘어날수록 지출도 비례하겠지... 엄마의 상황이 이해되며
마음이 비워져가는 듯 했다.
이기적인 나를 돌이켜보며 내 자식이 훗날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나는
엄마만큼 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갑작스레 돈 몇 백이
당장 필요했던 때가 있었다. 다짐과 상관없이 전처럼 엄마를 찾았고
다시 퇴짜(?)를 맞았을 때 능력 잃은 엄마를 괴롭히는 못된 딸인 나와
그런 상황을 만들어 준 남편을 증오하기도 했다.
기댈 기둥을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을 크게 맛 본 그날 이후 엄마에게
손을 벌리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지 몇 달 후 엄마의 비자금 통장을 알게 됐던
거였다. 명의만 내 것이지 결코 내 돈이 아닌 엄마의 돈이었지만
거리감과 섭섭함, 몰래 염탐한 것 같은 양심의 감정들 사이에서
근 한 달가량을 실랑이 벌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