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1년 전.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지 채 한 달도되지 않는 꼬마 계집아이가 홀로 남겨진 집안, 깜깜한 어둠속에서 밤마다 자가 최면을 걸기에 여념 없었다.
“무섭지 않아... 엄마가 그랬는걸... 원하기만 하면 내 꿈속에서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늘 나만 생각하고 있어서 함께 있지 않아도 보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는걸...난... 무섭지 않아.“
바람결에 흔들리는 창문이 귀신의 장난 같아서 공포에 휩싸인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했지만 백열등을 켤 수 없었다.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달빛에 의지한채 집안일을 했던 엄마를 보고 자란 탓에. 누군가의 강요 없이 홀로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꼬마에게 있어 불문법과 같이 되어버린 절약정신이 그것을 어기게 된다면 엄마의 딸 자격을 잃게 될 것만 같은 불안함까지 작은 가슴으로 떠안고 있었다. 낭비하면 엄마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게 될까봐 차라리 두려움과 싸울지언정 계집아이는 선뜻 불을 켤 수 없었다.
100밤만 세고나면 집으로 온다고 손가락 걸고 맹세했던 엄마의 약속을 위안삼고 6살, 1살의 남동생들과도 악수로 인사를 마친 뒤 등교를 위해 버스에 올랐을 때 차창 밖, 집 앞으로 나와선 엄마의 눈이 웬일인지 그새 금붕어 눈처럼 퉁퉁 부어있었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울만치 새하얀 치아를 들어내 놓고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꼬마도 엄마를 똑같이 따라서 손을 흔들며 활짝 웃어보였지만 흘러내리는 눈물만은 엄마처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불가피하다던 잠깐 동안의 가족 간에 이별이 기정사실화 되어 며칠이 지나갔건만 빈집에 홀로 남겨져 외톨이로 있다는 사실이 꼬마는 믿기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여닫이 현관문이 활짝 열리면서 엄마가 “딸!” 하고 웃으며 들어설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은 한 달에 한번쯤만 벌어지곤 했다.
꼬마에게 제일 가까이에 있는 혈육이라고는 30m쯤 떨어진 길 건너에 살고 있는 남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둘째 이모네가 전부였다.
쌍둥이 의붓자식 셋과 이모가 배 아파 낳은 자식 셋을 함께 거두는 이모는 동네에서 제일 크고 좋은 집에서 살았고 텔레비전과 자가용을 유일하게 소유한 부자였으며 항시 오뎅볶음과 장조림과 계란반찬을 올려놓은 호사스런 밥상을 차릴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살면서도 늘상 심통 난 표정에 행복이 고픈 빈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웃을 때라고는 당신이 배 아파 낳은 막내아들을 대할 때뿐이었다.
꼬마보다 두 살이 많은 이모의 막내아들은 철딱서니 없기가 세상에 제일이었다.
“엄마!!! 내가 밥에 카라멜 넣고 콜라에 말아서 모두 먹으면 돈을 얼마 줄 거야?“
하는 식의 별난 말과 그 못지않은 행동을 일삼아도 호탕하게 웃어보이곤 했던 별난 아들을 관대하게 상대해주던 별난 엄마였다. 한마디로 별스런 모자간이었다고나 할까...
꼬마는 이모의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것같은 얼굴과 매섭게 노려보는 눈초리가 무섭고 싫었다. 꼬마에게 있어서 이모는 심청전의 뺑덕어멈이었고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의 새엄마였으며 욕심 많은 놀부와 같은 이롭지 못한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곁에 있을 적에도 이모는 조카들에게 모든 것에 있어서 인색하게 굴었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서 벌였던 잔치 외에는 따뜻한 밥 한 번을 먹여준 적이 없었다. 옆에 당신의 자식들이 잔뜩 있어도 그보다 어린 조카들을 불러다가 부려먹고 했던 요상시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운수업으로 바쁘다는 이모부라는 사람은 코쭝배기도 보기 힘겨웠다.
그런 자신의 언니에게 취학을 한 탓에 데려갈 수 없던 딸을 부탁해야 했던 꼬마의 엄마가 봄 동안의 고기잡이를 위해 남편을 따라서 함께 배를 끌고 멀리 전라도까지 내려가야 했던 며칠 전부터 꼬맹이에게 각인시키려던 것이 있었다.
“이모네서 밥을 얻어먹으려면 부를 때를 기다리지 말고 일찍 준비하고 있다가 그곳에 가서 있어야한다.“
꼬마는 엄마의 충고에 따르며 자명종을 6시에 맞춰놓고 일어나서 씻고 준비했다가 7시20분행 버스를 타기 위해 6시30분이면 이모네 마루에 앉아있었지만 늘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버스를 놓치기 직전이 돼서야 밥 몇 술 뜨지도 못하고 황급히 달려 나가기 일쑤였다.
또 점심밥을 얻어먹기 위해선 몇 가지 잔심부름을 해야 했고 저녁은 기다리다 지쳐 빈집으로 돌아와서 굶고 자기가 다반사였다. 잠에 취한 꼬마를 때론 이모의 의붓딸이 와서 짜증스런 목소리로 밥 먹으라며 깨우기도 했지만 이른 시간부터 늦은 시간동안 어린 것이 견디기에 벅찬 하루로 지친 몸을 일으키지 못해서 ‘안 먹을래’하며 저녁 먹길 포기하기도 했다.
선견지명이 남다른 꼬마의 엄마는 그런 때를 대비한 듯 챙겨놓은 것이 있었다. 윗목에 작은 비키니장롱 안, 제일 아래 이불사이에.
“이거 10만원이야. 장롱 이곳(이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깊숙이 넣어 놓을 테니까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밥 못 먹었을 때 굶지 말고 빵하고 우유라도 사먹어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준비물이 있으면 이모에게 돈 달라고 해. 엄마가 이모한테 나중에 줄거니까 눈치 보지 말고. 이건 꼭 너만 알고 있어야한다. 꼭!“
거듭 강조하며 천원권 지폐 한 다발을 집어넣은 이불속에 꼬맹이가 확인하여 만져 볼 수 있는 예행연습(?)까지 여러 번 반복시키셨다.
하지만 꼬마는 시간이 갈수록 그 큰돈을 쓰는 것이 두려웠다. 함부로 썼다가 부모님이 돌아오기 전에 모두 써버리게 될까봐서.
부모님과 떨어진지 며칠 지난 어느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이모가 당신 자식들에겐 군것질을 하라며 천원씩 건넬 때 주눅 든 목소리로 준비물 살 것이 있다며 500원만 달라는 조카의 말에 눈초리를 세우며,
“아니, 네 엄마는 먼 길 떠나면서 돈도 안 쥐어 주디? 혹시 엄마가 준 돈 있으면 이모한테 맡겨. 보관했다가 줄 테니까. 네가 갖고 있다간 잊어버린다.“
했던 냉기 스민 어투의 말을 들은 후로 지폐다발을 만지는 것이 더욱 두려워지고 말았다. 꼬마에게 있어서 이모는 남보다 두려운 사람이었다. 철저하게 독립적인 외톨이로 있다는 것을 절감한 순간이 부모님이 올 동안 그 돈으로 버텨야한다는 생존전략을 자각한 순간이기도 했기에.
엄마말대로 100일가량을 그렇게 홀로 지내면서 꼬마가 쓴 돈이 3천원가량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엄마나 아빠가 하룻밤을 다녀가시며 쓴 돈을 채워주겠다며 얼마나 썼냐고 물을 때마다 자랑스럽게 줄지 않은 지폐다발을 꺼내보였다. 놀라는 부모님을 대할 때 꼬마는 뿌듯한 마음이었다.
어둔 밤 공포와 싸워야 했고 뱃속에서 귀뚜라미 몇 마리가 울어대는 것 같은 소리가 날 때마다 배고픔과 신경전을 벌여야했지만 가물거리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아내곤 했다. 고작 8살짜리가.
이듬해 봄, 꼬마는 2학년이 되었고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1학년이 됐을 때 둘만 남겨진 집에서 밤마다 무섭다고 우는 동생을 괜찮다며 달래야했고 배고프다고 떼쓰는 동생의 손을 잡고 가게에서 사온 빵 하나를 물과 먹이며 썼던 돈도 채 만원을 넘기지 않았었다. 허투루 돈을 쓰지 않는 딸을 믿은 부모님의 배려로 꼬마의 용돈은 자라면서도 늘 넘쳐나도록 풍족했다.
“세상에 돈이 전부 말라도 우리 딸래미 돈은 마르지 않을 거야.” “우리 딸은 사막한복판에 내려놓아도 살아갈 수 있을 거다.”
믿었던 마음이었고 바랬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꼬마도 그 말을 믿었고 부모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자신감도 넘쳐났었다. 코흘리개 어린꼬맹이 시절에도 환경에 쉽게 굴복하지 않던 긍지를 지녔으니 뭐든 잘할 것 같은 어른이 된다면야 말할 것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꼬마가 자라서 살아보니 세상에 돈이 남아 돌지언정 제 주머니만 메마른 듯하고 녹색공원에 내려놓으면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릴 것같은 칙칙한 심보가 되어버린 듯 하다. 긍지와 뚝심과 강단이 있던 어린 꼬맹이가 자라서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자꾸만 움츠려들고 숨어버리고 싶은 비겁녀가 되어간다. 둘째이모의 표정처럼 행복과 금전이 고픈 빈곤한 얼굴로 되어간다. 그 꼬마가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일까... 찾고 싶다. 꼬마를...